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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타티스 Mar 23. 2023

모래와 만남

자기 연결의 시간

"자~ 지금부터 다른 생각들은 잠시 옆에 내려놓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가져보도록 하겠습니다.


내가 여기 앉아 있다는 것을 알아차려봅니다."


이렇게 시작했다. 목요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는 게슈탈트모래놀이치료 수련날이다. 그동안은 언어상담 수련을 하다가 이제는 모래상자를 앞에 두고 수련을 시작했다. 교수님은 강조하신다. 우리는 언어를 중심으로 하는 상담자이지만 모래를 통해서 내담자와 만나는 거라고.



수련을 여러 군데 하고 있지만 여기는 개성이 뚜렷하다. 나는 매체가 필요한 상담자라고 느껴져서 신청했다. 나의 특징 중 하나인 직관성을 활용할 수 있는 상담이라고 판단했기 때문도 있다. 아무튼 오늘 나의 모래와는 처음 만났다.


모래상자에 손을 얹고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옆에 여러 가지 모양의 피겨도 있다. 내가 상담자 일 때도, 내담자 일 때도 피겨를 써봤지만, 모래 위의 피겨는 뭔가 다르게 느껴진다. 앞으로 어떤 배움을 하게 될지 궁금하다.


오늘은 내담자 역할이었다. 화요일부터 체했던 몸과 마음을 다루고 싶어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원래도 내 이야기를 잘하는 편이긴 했지만, 모래 위에 손을 얹고 이야기를 하니 뭔가 느껴졌다. 상담자분이 리드를 하시는데, 가슴이 답답한 걸 모래 위에서 느껴보라고 하니 진짜 모래가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이후 여러 가지 질문을 했다.


내가 시험불안 이야기를 먼저 꺼냈고, 예전에는 뭔가를 할 때 100이면 충분한 일을 150-200 정도 에너지를 들여서 했다면 이제는 80만 하자는 마음으로 바꾸었다고 했다. 그런데 머리로는 그 걸 인지하고 있는지 마음은 아직 못 따라가서 체했는가 보다고 이야기했다.


상담자가 어떤 마음이냐고 물었고 아마도 나는 불안한 마음이라고 대답했던 거 같다. 그 이후 불안한 마음을 모래로 표현해 보라고 하셨다. 상자에 있는 모래를 다 써도 불안을 표현하지 못 할거 같다고 대답했다. 그러면 화요일에 그 불안한 마음이 수요일에는 어땠냐고 물었다. 수요일도 마찬가지라고 답했다. 사실 화요일 발표수업에 타격입은 이후 수요일 강의도 폭망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바로 한의원으로 가서 진료를 받았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마음이냐고 모래로 표현해 보라고 했다. 그랬더니 높았던 모래를 편평하게 만들게 되었다. 신기하네? 내 마음이 표현이 되었다. 그리고 이 마음을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었다.


나는 모래 중간에 길을 만들었다. 어디 여행을 가서 바다가 갈라지는 걸 봤다. 사실 썰물이 되면서 길이 만들어지는 거였는데, 내 눈에는 바다가 두 개로 갈라지면서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떠올랐다. 힘들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이 불안한 마음을 어떻게 하고 싶냐고 또 물었다. 나는 같이 데리고 살고 싶다고 답했다. 열 살 때부터 함께했던 아이였다고. 예전에는 싫었지만 이제는 함께 살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불안이 아니라 다른 이름을 붙여보라고 하길래, '도움이'라고 붙여 주었다.


작년에는 내 안에 완벽이 와 화해를 하고 잘 지내보자고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 아이가 어디 있지?) 이제는 불안과도 친해질 듯하다. 그 시험불안 덕분에 더 많은 준비를 했었고, 지금까지 오기도 했나 보다. 이제는 100 중에 80만 하자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데, 조금 바꿔야 할 거 같긴 하다. 전문적인 영역에서는 100은 해야겠다. 80만 하니 문제가 생기네. 나의 전문성도 그렇고 몸에도 타격을 입는다. 예전처럼 150, 200까지 과하게 할 필요는 없지만 100은 하자.


다음 주 수요일 강의는 차근차근 미리 ppt와 대본을 준비하자. 최소한 일요일까지는 말이다. 그래야 수요일 오전 융 심리학 수업을 마음 편안하게 들을 수 있을 듯하다. 융 수업을 진짜 좋아하는데 두 번이나 빠졌다. 강의 준비 때문에. 이제는 100은 하자고 마음먹어야지.


그리고 지금 하는 게 많긴 하다. 2학기에는 무엇을 줄이고 무엇을 유지할 것인지 결정해야지 이 상태로 박사지원은 무리일 듯하다.


올해 나의 키워드는 '자기 연결'이다. 나에게 오늘 만난 '모래'는 자기 연결의 통로가 될 거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온다. 내 촉은 가끔 맞기도 하고 가끔은 틀리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잘 활용해 봐야겠다.


교수님이 그러셨다.


상담자가 느껴봐야지 내담자에게도 전해줄 수 있다고.


그리고 교육분석 교수님이 그러셨다.


선생님은 스스로 내면의 작업을 할 힘이 있다고.


그때는 "제가요?"라고 다시 물었지만, 모래를 만나니 살짝이 용기가 생기는 거 같다.



이상, 모래와 첫 만남에 대한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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