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

ㄴㄴ ㄴㄴㄴ ㄴㄴ..

by 릴리슈슈


프로학원러였던 시절이 있었다.

퇴사하자마자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몽땅 배웠던 때였다. 중국어, 한식, 수영, 미싱, 그림 등을 배우러 다녔다. 이 밖에도 잠깐 배운 것들이 몇 가지 더 있다.
잠깐 배운 것 중 하나가 캘리그래피였다. 최근엔 무척 악필이 되었지마는 초등학교 1, 2학년 동안 경필 대회 1등을 놓치지 않았던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로서, 캘리그래피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런데 요새도 경필 대회가 있는지? 아니 저 단어를 쓰기는 하는지, 아이들이 단어를 알긴 할까 궁금해진다.

언제곤 꼭 배워야지_하며 인스타에서 캘리 작품이 보일 때마다 유심히 봐 두었다.

캘리그래피 작가는 꽤 많은데, 이들은 인스타그램에 자신의 작품을 올리고, 강의를 다니거나 수업을 한다. 작가들마다 글씨 스타일이 무척 달라서, 내 취향의 글씨를 만나는 것부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고 또 그 사람이 지방이 아닌 서울에서, 내가 가능한 일정에 마침 수업을 여는 일도 생각보다 흔치 않다. 하지만 계속 관심을 갖고 지켜보다 보니 마음에 꼭 드는 글씨를 만날 수 있었고, 수업 날짜도 맞아떨어져 나는 배워보기로 했다.


때는 늦은 겨울 저녁이었다.

장소는 신촌의 꽤 높은 건물 꼭대기 층의 카페였는데, 탁자와 의자의 색이 마호가니처럼 깊어서 겨울밤에 특히나 더 어울리는 공간이었다. 밤이 금세 찾아오는 계절에 밤처럼 까만 잉크를 가지고 깊은 나무색에 둘러싸여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자체로 나는 꽤 기분이 좋았다.
수업은 꽤 타이트했다. 2시간 정도였는데, 글씨 쓸 때 주의해야 할 점에 대해 강의를 듣고, 써보고, 교정을 받는 것을 반복했다. 시간이 어찌나 빨리 지나가는지 끝날 시간이 되면 모두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갔어요." 하며 시켜두고는 채 몇 모금 마시지 않은 라떼나 자몽차 등을 그제야 벌컥벌컥 마시곤 했다. 카페의 커피 맛은 꽤 괜찮았지만, 그래서 나는 식은 커피의 맛 밖에 기억하지 못한다. 2시간은 길기도, 짧기도 하다. 2시간 만에 필체가 갑자기 드라마틱하게 변하는 일은 없어서,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꼭 연습해와야 한다고 당부를 했다. 가방에 검은 잉크를 넣은 작은 상자와 딥펜촉과 대, 그리고 무인양품의 방안지와 그것을 잘 묶어둔 빨간색 플라스틱 쫄대를 넣고 집으로 돌아가 나는 종종 글씨 쓰는 연습을 했다. 복습을 잘 하는 타입이 아닌데도 글씨는 종종 쓰고 싶었다.


일주일에 한 번, 4주 간 4번의 수업으로 이루어진 입문 강좌를 모두 들었다.

마지막 날은 빳빳한 무지 엽서에 각자 쓰고 싶은 글귀를 공들여 쓰는 수업이었다. 쓰고 싶은 글귀를 미리 준비해 가야 해서, 수업 가는 길에 이런저런 글귀들을 찾아보았다. 나는 '너의 가죽신이 행복한 발자국을 남기기를, 그리고 무지개가 항상 너의 어깨에 닿기를'이라는 어느 네이티브 아메리칸의 글귀를 찾아가 써넣었다. 완성한 엽서는 꽤 그럴듯해 보였지만 그래도 아쉬울 수밖에 없는, 실력이랄 것도 없는 모양새였다. 그렇게 글씨를 쓰던 겨울이 지나갔다.


그 이후로도 가끔, 아주 가끔 나는 잉크와 딥펜을 꺼내어 글씨를 썼다.

무인양품 종이의 질이 좋은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부드러운 종이 위에서 일어나는 사각거리는 소리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인스타에서 찾아낸 마음에 드는 글씨들을 하나씩 열어두고 이리저리 따라 써보기도 하고, 이전에 썼던 글씨를 다시 써 보기도 한다. 글씨가 너무 중구난방이어서 고만 쓰고 싶어 질 때도 생긴다. 하지만 다시 천천히 써본다. 주의를 기울여 글씨를 쓰면 어느 구석이건 반드시 좋아진다. 그것이 신기하여 또 가만히 펜촉을 이리 저리로 움직여 보게 된다. 자음에서 모음으로 확장되고 그것이 한 글자가 되고 글자들이 모여 단어와 문장과 한 단락을 이루어가는 것을 지켜보게 된다. 획 하나라도 전체가 흘러가는 방향을 벗어나면 그것이 그렇게 눈에 튀게 들어와서 모든 것을 다 흐트러트리고 만다.


하여 처음에 글씨를 쓸 때는 첫 번째 자음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너의 가죽신이..' 하고 써야 하는데 '너'는커녕 'ㄴ' 만 쓰다가 끝나는 것이다. ㄴ ㄴ ㄴㄴ ㄴㄴ ㄴ... 그 'ㄴ' 이 마음에 안 들어서 다른 글자로 이동하지 못하는 것이다. 꼭 말을 더듬 듯, 더듬거리기만 하다 아무 말도 꺼내놓지 못하고 거기서 주저 않아 버리는 것이다. 선생님은 나의 연습 노트를 보고 말했다.

"괜찮으니까 끝까지 쓰는 훈련을 하셔야 해요."


오래된 이발사는 머리칼을, 구두수선공은 구두를 보고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경력이 10년쯤 되면 오래됐다고 볼 수 있을 텐데, 그쯤 되면 한 구석만 보아도 전체를 가늠할 수 있는 통찰이 생기는 모양이다. 우리 캘리 선생님도 글씨 쓴 지 10년 됐다던데, 아무래도 난 들킨 것 같다.


글씨를 새로 배운 지 벌써 8개월이 지났다.

연습 노트를 넘겨보면, 뒷장으로 갈수록 말더듬이 줄어있다. 자음 혹은 모음 한 도막보다는 단어나 문장이나 단락인 나의 글씨가 발견된다. 글씨도 꽤 보아줄 만한 모양새가 되어간다. 기특하다. 연습용 종이는 조금 남았다. 생은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겠다. 무인양품에 가서 종이를 좀 더 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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