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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Sep 03. 2018

내 낡은 이불속의 꼬리

내일 또 한 번,  조금 더 멀리 헤엄쳐 보자.

-

"너 한국 온 지 벌써 10년 됐어."


-

거실에서 함께 후식을 먹던 김여사가 말했다.

"벌써?"


나는 이리저리 머리를 굴렸지만 너무 오래되어 잘 셈해지지 않았다. 하여 한국을 떠났던 해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아냐, 8년. 8년 됐어."

그런데 김여사는 갑자기 왜 그 오래된 시간을 꺼냈을까?


"저 이불이 8년 됐어."

김여사가 시원한 거실에서 살풋 잠이 든 아버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낡고 해어진 솜이불이 아버지를 덮고 있었다.

"너 오는데 덮을 이불 없다고 그날 이불집 가서 부랴부랴 샀잖아, 제일 좋은 걸로.

  근데 인제 저게 저렇게 낡았다. 예쁜 하늘색이었는데 색깔도 다 빠지고.."


-

나도 그동안 그만큼 늙었지 뭐._ 라고 습관처럼 대답하려다가 입을 닫았다.

아유, 제때 입 닫아 천만다행이다. 대답 한번 참 별로다.


김여사는 말을 이었다.

"근데 니가 오자마자 다시 가버려서.. 내가 제일 많이 덮었지 뭐."


한국에 들어와서, 집에 한 달을 채 붙어있지 않고 나는 다시 집을 떠났다.

회사 일 때문이었고, 당시 김여사는 내게 별 말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를 떠올리는 지금 김여사의 목소리가 쓸쓸해서 나는 놀랐다. 김여사가 아무 말하지 않아서, 나는 김여사가 아무렇지 않은 줄 알았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어쩜 그렇게 몰랐을까.

'야 이것 봐라. 그때 얼마나 어른인 척했냐. 근데 어른은 무슨..'


-

몇 년 만에 딸이 온다고 정신없이 집 단장을 하다 문득 이불이 없다는 걸 알고 부랴부랴 이불집으로 뛰는 듯 발걸음을 옮겼을 김여사. 이불가게의 선반을 모조리 눈으로 훑고 꺼내어 만지고는 가장 가볍고 폭신한 이불을 골랐을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가장 비쌌을 것이다. 그 와중에 또 딸이 좋아하는 하늘색으로 골랐을 것이다.

영화를 보듯 그 풍경들을 떠올리니, 아. 그동안 나는 늙은 것이 아니라 쌓여온 것이다.


김여사와 아버지와 나의 혈육이 내게 해 준 것들, 직장 선후배와 동료들이 내게 준 것들, 나의 지인들이 내게 준 것들 모두가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서 나를 일으키고 걸어 움직이게 해 주었다. 내가 걸은 걸음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었다. 그 모두가 나를 쌓고 이루어 걷게 한 것..


그렇게 생각하니 가슴이 시큰하였다.

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바래져 하얘져가는 솜이불을 보였다. 낡았지만 세월이 얹혀 더 포근해진 이불은 아버지 몸에 돌돌 감기고도 남았다. 이불은 아버지 발끝을 한참 넘어서까지 말려있다 내 발치쯤 와서 다시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 모양새가 꼭 인어 꼬리 같았다.


"아버지 저렇게 이불을 말고 계시니 꼭 인어공주 같네."

김여사는 이불인지 남편인지를 보고는 씩 웃었다.

이불을 말고 있는 아버지가 꼭 나인 것 같다.

김여사가, 아버지가, 세상이 나를 저 이불처럼 안아주고 덮어주었다 싶어 마음이 포근해졌다. 그리고 그 정성과 사랑이 내게 먼 바다로 나갈 수 있는 크고 멋진 꼬리를 달아주었다는 싶어 용기가 불끈 난다. 드넓어 알 수 없고 그래서 때론 두렵게 느껴지는 이 거대한 바다도 내 꼬리와 비슷한 색깔을 했다고 생각하면 또 한 번 할 수 있는 데까지 나가보고 싶어 진다.


-

김여사가 사 준 낡은 이불의 힘을 받아, 그래. 내일 또 한 번 조금 더 멀리 헤엄쳐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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