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릴리슈슈 Sep 02. 2018

그림을 그립시다.

마음에 안 들면 다음장에 다시 그려요. 참 쉽죠?

-

또 그림을 배우러 갔다.


그동안 참으로 여러 가지로 그림을 배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내가 뭘 그리고 싶은지를 아는 데만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에 알맞은 수업을 찾는데도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렇게 찾은 수업을 듣게 되기까지도 3개월이 더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그 수업을 듣게 되었다.

4주 동안 자신만의 캐릭터를 만들어 인스타툰을 만드는 수업.


수업의 슨생님은 인스타를 통해 알게 된 유명! 일러스트레이터이다. 뒤늦게 인스타를 시작해 처음으로 팔로우한 일러스트레이터이기도 하다.

그녀의 작품은 오랫동안 봐왔지만, 실제로 그를 만나 그에게 배우게 된다고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

장소는 합정의 한 카페.

합정으로 향하는 길 위의 태양은 아직 뜨거웠지만 그래도 9월이라고 슬슬 바람이 불었다.

도착한 카페는 온실 같았다. 카페의 여러 벽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여 스터디룸에 들어서니 마치 온실 속에서 자그맣게 산들거리는 잎사귀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온실 같은 스터디룸 안에는 단발머리에 하얀 블라우스를 입은 작가님이 맨 앞에 단정히 앉아 있었다. 작가님을 실제로 보는 것도, 오랫동안 봐 왔던 그녀의 캐릭터가 실시간으로 그려지는 것을 모니터로 지켜보는 것도 모두 신기하여, 내 마음은 연신 산들거렸다.


-

작가님은 가장 처음으로 선긋기 연습을 알려주었다.

우리는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선을 그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선을 그었다. 동그라미를 그리고, 세모를 그렸다.


커다란 동그라미 위에 눈, 코, 입을 얹었다.

나는 크고 작은 눈을 그렸다. 코를 높게 세웠다가는 다 지웠다. 코에다는 콧대 없이 구멍만 두 개 뽕뽕 뚫어놓았다. 킬킬거리는 입도 달아주었다.

정면의 얼굴을 완성한 뒤에는 옆얼굴과 뒷 얼굴을 차례로 그렸다.


예전에 이미 혼자서 여러 가지로 그려보았었기 때문에 대체로 슥슥 그릴 수 있었지만, 이마와 헤어라인의 비율이랄지 뒤통수의 헤어라인 위치를 정하는 것은 어려웠다.


손을 들어 작가님에게 질문했다.  그녀가 다가와 내 그림을 보곤 웃으며 말했다.

"귀여워요"

아, 우리... 라고 했..  아니, 귀엽..다고 했다. 흐흣.


작가님의 간결한 설명 덕분에 나는 헤어라인을 일필휘지로 그어내고 금방 색칠에 돌입할 수 있었다.

언제고 한 번은 꼭 빨간 머리를 해보리라는 오랜 결심을 캐릭터에 부어 넣어 빨간색, 오렌지색, 자주색 머리칼을 촘촘히 심었다. 내 머리칼도 아닌데 속이 후련했다.



-

“킥킥킥”

그리는 내내 혼자 키득거렸다.

문득 온통 조용한 스터디룸 안에서 키득거리는 게 나뿐인 것을 알았다. 창피한 마음에, ‘이건 다 카페인 때문!’ 이라고 혼자 외치며 실컷 잘 마신 커피 탓을 했다.


하지만 사실 커피는 그 들뜬 마음의 30일뿐. 나머지 70은 순전히 동그라미와 세모와 네모, 눈과 코와 입과 색연필의 몫이었다. 오랫동안 혼자 품어왔던 것을 마침내 종이 위에 꺼내놓게 되었으니, 들뜨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오랫동안 반복했던 나의 오랜 고민들('누구나 그리는 뻔한 그림 아닌가', '아무래도 특색이 없지', '너무 기본이 없지' 등등..)은 작가님의 정갈하고 따듯한 설명으로 잠잠해졌다. 고민이 만들어낸 머뭇거림들도 따라 잠잠해졌다. 내 오랜 친구였던 고민과 머뭇거림들이 아무 말이 없어졌다. 갑자기 낯선 사람같이 굴었다. 그렇게 그들은 갑작스레 내게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었다.


시끄럽던 애들이 조용해지자, 그 자리엔 슬슬 용기가 들어서기 시작했다.

'무엇이 되었든 다 괜찮네' 하는 마음이 되어, 나는 생각나는 것들을 바쁘게 늘어놓았다. 없는 자신감만큼 항상 흐릿했던 연필선도 오늘만큼은 달랐다. 오늘의 내 연필선들은 지우개로 빡빡 지워도 뚜렷이 자국이 남을 만큼 깊고 진했다.



-

그러게. 틀리면 어떻고 자국이 남으면 어떠냐.

틀릴 것도 없는 데다, 그래도 마음에 안 들면 종이를 넘겨 새로운 종이에 다시 또 그리면 그만인 것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기쁨과 지독한 애달픔으로 죽을 것 같았던 지난 세월들도 이젠 그저 전생처럼 희미하고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서툴어 다시 그리는 그림 한 두장이 무슨 대수겠나.


그렇게 생각하니 가물거렸던 눈이 갑자기 환해진다.

내 이 삶도 ‘좀 멋대로 살면 어떠냐_’ 싶어 진다.

삶이야말로 틀릴 것이 없질 않는가.

그리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삶도 페이지를 넘겨 새로 그리면 되질 않겠는가.

감사하게도 인생은 매일 알아서 새로운 페이지를 넘겨주기까지 하니까.



그러니,

그림을 그립시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씅에 차지 않으면, 페이지를 넘겨버리면 그만이그등요.


그러니 안심하고,

그림을 그립시다.

무엇이든 그리고, 또 그립시다.






작가의 이전글 모든 언어는 오해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