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의 상림이라는 숲을 주제로 한 프로젝트가 있었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과 음악가 정재일의 작품이다.
이 '상림 프로젝트' 중 <whispering>의 뮤직비디오에는 숲의 무성한 머리끝을 조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나온다. 때문에 화면에는 울창하고 푸른 색깔만이 가득하다. 숲은 때로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기도 하고 때론 비를 맞고 있기도 하다. 내리는 비에 축축한 숲을 모니터 앞에 우두커니 앉아 바라본다.
마음이 순식간에 텅 비워지고 마는 영상과 음악. 크으.
저 화면이 불러 일으키는 기억 속 몇 가지 풍경이 있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것은 제주의 한 숲이다.
제주에는 아름다운 곳이 많다. 섬을 둘러싼 해변은 어느 한 곳 빼놓을 데 없이 제각각 아름다워 손을 꼽자면 늘 그 손을 늘 머뭇거리게 한다. 그러나 결국 제일로 꼽게 되는 곳은 수많은 바다 중 그 어디가 아니라 숲. 비자림이 된다.
비자림에 처음 갔던 것은 대학교 일학년 때의 일이다. 늘 그렇듯 새벽까지 잔뜩 술을 먹고 무거운 카메라를 짊어지고 여러번 버스를 갈아타 비자림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날은 흐려 도착할 쯤엔 비까지 왔다. 얇은 형광색의 싸구려 우비에 몸을 집어넣으면 바깥에서 떨어지는 비를 막을 수는 있었지만 우비 속에서는 땀이 차서, 그저 눅눅하고 불편할 뿐이다. 그런 상태로 숲에 들어갔다.
사실 그렇게 많은 장면은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것은 빗물이 일으킨 짙은 흙과 나무 냄새, 숲길을 꽤 걸어들어갔을때 맞닥뜨린 거대한 비자나무이다.
상림 뮤비를 들여다보다, 또 축축한 비자림 속에 푹 잠겼다 한참만에 일어났다.
너무 오래 있었나 싶어 멋적은 마음에, 쓸데없다며 빗질하듯 기억을 쓸어냈다. 내가 가진 기억들이 종종 그렇게 쓸데없어보인다. 계룡산 자락 어느 절간 같은데의 처마에서 떨어지던 빗물을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던 내 모습 같은 것이 무엇에 쓸데가 있을까 싶은 것이다.
하지만 천년의 비자나무와, 그와 함께 첩첩이 머물러 있는 비자나무들을 보며 나의 순간들이 켜켜이 첩첩이 쌓여있을수록 그 향이 짙고 짙어지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그리고 운 좋게 비라도 온다면 오래된 향들이 싱싱해지기도 하지 않을까.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이다. 나의 나이테는 얼마나 쌓였을까, 구석 구석의 옹이가 부끄럽기도 하고 나의 향의 두께는 또 얼마나 되었을까, 고운 향이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잔뜩 하는 것이다.
2018. 1. 14. 1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