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해주셨던 분들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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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타지인으로 사는 사람이 있다.
그는 많은 곳에 가보고 싶어 한다. 나는 주로 지인들에게 실려 어디론가 가는 편이기 때문에, 그를 데리고 먼 곳을 갈 수 있는 깜냥은 되지 않지만, 가까운 곳이라면 보여줄 수 있고, 그래서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아름다운 한국을 다는 못 보여주더라도 그중 서울은, 우리 동네의 아름다운 곳은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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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엔 그와 함께 동네에 있는 사우론 타워 롯데타워에 가서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 옆, 나의 최애 장소인 석촌호수에 갔다. 버니니 및 호가든 로제와 함께 하는 유월의 호수를 싫어할 수 있는 사람은 단언하건대 없다. 하여 나는 자신 있게 그를 데려갔다.
역시 그는 좋아라 했다. 나는 잠깐 뿌듯했다가, 그의 얼굴 위로 오랫동안 타지 생활을 했던 나를 보았다. 그리고 이곳저곳의 기억들이 함께 떠올랐다.
나는 어느 시골마을의 아주 허름한 영화관엘 갔었다. 손으로 좌석번호를 적어주는 작은 영화관이었다. 버터를 빌리러 옆집에 가려면 보트를 타고 15분을 달려야 하는 어느 호수의 별장에도 가보았다. 그리고 버터 한 조각을 빌리러 정말로 15분을 달렸다. 작은 갑판에 앉아 장난감 같은 작고 가느다란 낚싯대를 드리워 내 손바닥보다 작은 물고기를 건지기도 했다. 밤에는 핀란드식 사우나에 들어앉았다가 견딜 수 없을 때가 되면 벌거벗은 채로 바로 옆 호수에 뛰어들어가기도 했다. 캠핑을 가서는 먼 바다 위로 꽝꽝 내리꽂는 벼락들을 몇십 분 동안이나 구경하는 일도 있었다. 우연히 들어간 어느 국도 휴게소에서 아주 기막힌 맛의 할라피뇨 치즈 샌드위치를 만나기도 했다.
모든 것이 이방인인 나 혼자서는 쉽게 경험할 수 없는 일들이었다. 그때도 고마웠지만 떠올릴 때마다 고마움이 켜켜이 쌓여 이내 마음이 묵지근해버리는 기억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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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오늘은 퇴근길에 한강에 들렀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에 가보고 싶다던 그에게 한강을 보여주고 싶은데, 사실 나도 잘은 몰라서 답사를 가볼 요량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자전거 진입로를 물어 들어갔다. 네이버 지도에 익숙해진 뒤, 한국에서 행인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실로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행인의 친절하고 정확하고 간결한 설명 덕에 나는 무사히 한강 철교에 올라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한강변에 내렸다. 예상 밖으로 바람이 꽤 시원했다. '잘 왔다' 생각했는데, 컴컴한 강변에 들어서서야 오늘 헤드라이트를 가지고 나오지 않은 것을 알았다.
'할 수 없지 뭐. 하얀 블라우스 입고 나온 게 어디냐.'
허연 것이 천천히 움직이면 치일 일은 없겠지 싶어 나는 천천히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어느 한강 다리가 밤에 가장 예쁜지, 어디에 볼만한 게 있는지, 첫 번째 편의점은 몇 분만에 나타나는지, 제일 냄새가 좋은 치킨을 파는 편의점은 몇 번째 편의점인지를 두리번대며 찾기도 하고, 세기도 하고, 시간을 재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이 곳을 달리는 모습을 그려보았다.
이르게 핀 코스모스를 보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텐트를 치고 누워 책 읽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겠지? 밤이라 잘 보이진 않지만 야외 수영장이 있고 이미 개장을 했다고 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와보고 싶다고 말할까? 아니면 수영을 잘하지 못한다고 말할까?
비가 많이 온 탓에 한강에도 물이 가득하여 구경하기 딱 좋은 땐데, 모쪼록 그가 이 곳 저곳을 두리번대며 좋아했으면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이러다 좋아하지 않으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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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일렁이는 강물과 그 위에 띄워진 불빛들과 강아지들을 데리고 느긋하게 산책하는 사람들 사이를 달리다, 나를 그들의 일상으로 초대해주었던 곳곳의 지역민들을 생각했다.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라고, 자주 가는 공원이라고, 숨겨둔 산책로라고, 혹은 한 번도 안 와봐서 나를 데려오기 전에 먼저 둘러봤다고, 웃으며 말하던 그들을 생각했다. 그들은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심스럽게 살폈지만, 한편으론 내가 좋아했으면 하는 기대감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의 그 다정함으로 나는 이미 그 어떤 곳도 다 좋아하게 되었었다.
_ 아무래도 어린 외지인이었던 내가 갚지 못한 그 고마움을, 지금 이 곳의 그에게 대신 갚을 수 있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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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무엇 하나 하늘이 쓰다듬지 않는 것이 없어라,
무수히 많은 쓰다듬과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또 곱씹어 생각하고 또 곱씹어 생각하니 페달을 밟을 힘이 더 생긴다.
힘차게 발을 구르니 한강 바람이 더욱 나를 쓰다듬고 또 쓰다듬는다. 나는 매 순간 쓰다듬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