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어의 삶은 그만 두기로 해

나는 둔합니다.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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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꽤 예민하다. 어릴 때는 예민함을 큰 장점이라고 여겼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지금은 그것을 단점에 가까운 번거로움이라고 느낀다. 아무래도 점점 예민함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 같다. 아니, 예민함과 섬세함은 다른 것임을 이제사 안 것 같다.


김여사도 예민하다. 우리는 각자의 예민함과 서로의 예민함을 잘 감당하지 못한다. 하여 김여사는 요즘 '둔해지는 연습'을 한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누가 무슨 말이나 행동을 하건 대수롭지 않게 흘려버리는 연습이다.

'바보같아 보이지 않을까?'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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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사와 나는 수영장을 다닌다. 다른 시간 다른 수업을 듣는다. 그러나 같은 수영장 문화를 공유하고 있으므로 많은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엊그제 김여사의 일화를 하나 들었는데, 아주 흥미로웠다.


수영을 끝내고 나온 김여사가 샤워를 하러 한 자리를 잡고 섰다. 그런데 갑자기 어느 아주머니가 오더니 자기 자리라고 비키라고 했다. 그 자리는 분명 아무 짐도 없는 빈자리였다. 김여사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그냥 옆자리로 옮겼다. 그런데 그 아주머니가 거기도 임자가 있으니 비키라고 했다. 친구 자리까지 확보하는 뻔뻔함이었다.


김여사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평소같으면 얼굴을 붉히고 언성을 높일 준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최근 '둔해지는 연습' 을 하는 중이므로.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순순히 "알겠다" 대답했다. 다른 먼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새로운 자리의 선반에 목욕용품을 올려두려는 찰나, 가만. 아주 익숙한 게 있었다. 아주 익숙한 칫솔케이스와 그 속에 보이는 칫솔, 특히 치약. 흔치 않은 치약_ 시중에서 판매하지 않는 우리집 치약과 똑같이 생긴 치약.

아? 아! 김여사 본인의 칫솔세트였다.


김여사는 전날 잃어버려 한참을 찾았던 칫솔세트를 그렇게 발견했다. 칫솔세트는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24시간을 지새고, 그 자리를 지켰다. 김여사는 '둔해지는 연습'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가 닿았다. 김여사는 깔깔깔 웃었다. 그리고 갑작스레 번쩍이는 생각 하나를 얻었다. '순리와 흐름이란 인간의 계산법으로는 알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예민함은 때로 그 순리와 흐름에 저항하게 한다는 것' 을 알았다. 그리고 당신이 그렇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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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야, 놀랍잖아.' 나는 생각했다.

나의 예민함이란 무엇이었을까. 일어나는 상황들에, 맞지도 앉는 나만의 기준을 엄근진하게 들이댄 게 아닐까.그렇게 대보고 짤라내고 하니 남는 게 없었던 건 아닐까, 순리대로 흘러가지 못하고, 멈춰서거나 다른 엄한 길로 흘러간 건 아닐까, 예민함이 아니라 그저 아집 아니었을까. 잘난척 아니었을까.


아집, 잘난척이라니요. 쓰기만 해도 창피하다. 아... 창피하다. 창피해서, 되뇌이기로 했다.

"나는 둔합니다. 어수룩합니다. 똑똑한 척 하지 않습니다. 알아도 모르는 척 하도록 합니다. 사실 아는게 아는게 아닐거거든요."


복어 가시처럼 부풀어난 삐죽하고 예민한 것들은 바람을 빼내어 가라앉혀야겠다. 그럼 헛바람이 빠진 빈자리에 세상의 실하고 값진 이야기가 담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럼 저 칫솔세트처럼, 계속 날 기다리고 있는,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내 소중한 뭔가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촉을 곤두세우는 대신, 무던한 마음과 덤덤한 표정이라면 값진 것을 채우고 소중한 것을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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