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멈춰 서 주진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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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스스..
조용히, 먼지를 얇게 덮어쓰고 있는 것으로 장식품의 용도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나의 키보드와 그 받침대. 그 받침대에는 헤드셋이 걸려있다.
이전 직장에서 화상회의 때 쓰려고 샀던 헤드셋.
회의 소리를 최대한 안 들어보려고 제일 싼 걸로 샀던 헤드셋.
막상 사놓고 보니 스피커를 더 쓰게 되어 쓸쓸해했던 헤드셋.
대신 음악열이 타오르는 밤엔 키보드에 끼워져 <부르크뮐러>의 친구가 되어주었던 헤드셋.
무심코 돌아본 자리엔 그 헤드셋의 스펀지가 터덜터덜 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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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게 벌써 저렇게 녹아내리나? 몇 년이나 됐지?'
족히 4년은 되었다.
'시간 참..'
키보드의 친구가 되어주었다고는 했지만 키보드에 끼워졌던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
4년의 시간에 빗대어보면 그냥 저기에 걸려 있었던 것이 저 헤드셋의 생의 전부라 할 수 있겠다.
'헤드셋은. 아무것도.. 못한건가?'
헤드셋을 쳐다봤다.
헤드셋도 나를 쳐다보았을 것이다.
'언젠간 치겠지, 언젠간 치겠지..' 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지켜보기만 하는 이 한결같은 여자를,
헤드셋은 무슨 마음으로 바라봤을까?
악보대에 올라앉은 <부르크뮐러>와 <어드벤처 소나타>도 헤드셋과 같은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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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스라져가는 헤드셋을 다시 바라본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렇게 바스라진다니,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든다.
녹아 떨어져 나가는 누런 스펀지 조각들을 살그머니 손으로 비벼 만져보다
푸실푸실 벗겨지는 섬유 조각들이 꼭 내 살점 같아서, 내 시간 같아서, 번뜩 놀라 노트북을 켠다.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