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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슈슈 May 11. 2019

꼭 걸어야 한다면, 오월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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혈육의 지인과 일 관계로 인연을 맺게 되어 한동안 일을 함께 했다.

그와 어울려 회식을 하고 돌아가던 늦은 밤, 집에는 어떻게 가느냐고 묻는 그에게, 

"조금 걸을까 해요" 하고 대답했다.

"ㅇㅇ씨 오빠도 옛날에 그렇게 세네정거장씩 걸었는데, 핏줄은 핏줄인가봐요." 웃으며 그런다.

"그래요? 그러게요, 핏줄인가보네요." 하고 헤어졌다.


실은 걷는 것을 딱히 좋아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걸어야겠다고 결심하게 하는 때가 있다.

혼자 어찌할 수 없는 걱정이 가득한 날, 혹은 하루 종일 업무가 너무 빠르게 돌아간 날. 그런 날이다.

머리의 공회전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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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모르던 옛날의 오빠는 왜 그렇게 걸었을까?

혹시 혼자 어찌할 수 없는 걱정이 가득했을까, 아님 그냥 일이 너무 많았을까. 

땀을 내지도, 한기를 부르지도 않는 완벽한 오월, 초록의 밤거리를 걸으며 나는 오빠를 생각했다.

그렇게 걸었던 계절은 이렇게 완벽한 오월만은 아니었겠지?

어느때는 땀이 너무 많이 흘러내려 런닝이 피부에 달라붙었겠지. 

어느때는 단단히 여민 옷깃 틈을 찾아 들어온 바람에다 대고 뭐라 한마디 욕을 뱉었을지도 몰라.


마음이 조금 쓰렸다.


혹시 지금도 그렇게 남몰래 혼자 걷고 있는건 아닐까,

다리를 머리보다 더 많이 움직여, 머리의 공회전을 멈춰보려 애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계속 걷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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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이유로 걸을 일이 없었으면 좋겠지만, 정히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좀 걸어야 하는 날이 일년에 며칠정도는 누구에게나 꼭 배정되어야만 한다면.

오빠에게는 그것이 오월이었으면 좋겠다.

땀도 한기도 없는, 생장하고 생동하는 연한 초록이 가득한 오월.

거리의 모든 풀과 나무와 하늘과 그 아래의 사람들이 팽팽한 생기로 가득하여

느리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 오빠에게 말없는 말을 걸어주고 발없는 동행이 되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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