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아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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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인 나는 새벽에 화장실 가는 길에 거실에서 기도하고 있는 아빠를 만나곤 한다.
고요한 가운데에 있는 아빠의 모습은 어릴 적 내가 싫어하던 고주망태 아저씨의 모습과는 영 딴판이어서
나도 모르게 고요하게 따라 웃고, 아빠의 등을 손으로 쓸어보게 된다.
아빠는 40년이 훨씬 넘도록 새벽기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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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리고 아빠가 젊었을 무렵, 아빠는 내게 딱히 아빠가 아니었다. 돈도 엄마가 더 잘 벌고, 밥도 엄마가 해주었고, 각종 고지서를 챙기는 일이나 학교의 행사, 이사.. 모든 일들은 엄마 몫이었다.
아빠는 뭘 했는가? 화에 차 있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다. 나는 타지 생활을 십여 년 하고 돌아왔다. 아빠는 내게 낯을 가렸고, 나는 아빠가 더 이상 무섭지 않았다. 아빠는 나이가 들어있고, 나는 아빠의 이야기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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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발을 땅에 디뎌본 적이 없다고 했다.
집에 살던 머슴이 아빠를 늘 업고 다녔기 때문이었다. 친구들을 모두 데려오면 할머니가 국수를 한 바구니씩 삶아줬다고 했다. 모두가 굶던 시절이었다. 무엇이든 있던 곳간에서 아빠는 무엇이든 퍼다가 친구들을 줬다. 얼마나 줘도 티가 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빠가 중학생이 될 무렵. 아빠의 엄마가 돌아가셨다. 아빠의 아버지는 3년도 되지 않아 새 부인을 들였다. 새 부인은 부지깽이로 아빠를 자주 때렸다. 견디지 못한 아빠는 울면서 맨발로 고령에서 대구시내까지 걸었다. 새벽 4시에 출발했는데 오후 2시에 다다랐다. 그렇게 큰형의 옷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큰형은 좋은 사람이 아니었다. 어린 동생에게 세탁과 다림질을 하루 내내 시키면서도 급료를 주지 않았다. 어린 아빠는 그것이 부당한지 몰랐다. 아빠는 베트남전에 참전했다. 베트남전에서 번 돈은 누나에게 맡겼다. 꽤 많은 돈이었지만 아빠가 돌아왔을 때 누나는 내어줄 돈이 없다고 했다. 장사를 하던 아빠는 절에 들어갔다. 새벽 세시에 기도하던 할머니 때문이었겠다. 그러다 절에서 만난 스님이 외사촌을 소개해줬다. 나의 엄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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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지 생활 후 집으로 돌아와 아빠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들어서, 내가 아빠를 완전히 이해한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내 어린 날의 아빠를 생각하면 무섭고, 화가 나고, 엄마가 불쌍해서 눈물이 날 때가 많다. 다만,
아빠가 불쌍해서 눈물이 날 때도 생겼다.
한 평생을 기도 속 고요함과 현실 속 울분을 넘나 드느라, 그 커다란 진폭을 견디느라, 아니
자신을 부숴버릴 것 같은 울분을 겨우나마 삭혀주는 것이 기도라는 것을 알고, 살기 위해 기도를 붙잡고 있었을 한 사람. 그것이 뼈에 박힌 습관이 되어버린, 등이 굽어가는 나의 혈육을 등 뒤에 놓고 내 방문을 닫고 들어와 이부자리에 앉아, 사부작 사부작 조심스레 그가 몸을 굽혀 절하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그의 불우하고 외로왔던 몹시도 억울하고 분했던 그리고 그것들로부터 이제는 많이 자유로워진 그의 마음이 내 마음속으로 쏘옥 들어오면, 그를 미워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미워하던 마음이 길을 잃는다. 마음자리가 비어버린 나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고개를 돌려 방문 너머에서 움직이는 아빠를 본다. 마음이 시큰해져 버린다.
미움이, 기억이, 영영 사라진 것도 아니면서
아빠가 기도하는 새벽엔 미움과 기억과 미워하던 기억은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아주 멀리로 가버린다. 자리를 뜬다. 마치 내가 아빠를 모두 용서한 것처럼, 그래서 언젠간 아빠를 내내 그리워만 할 것처럼.
그래서 나는 울고 만다.
마치 아빠를 모두 용서한 것 같아서, 그래서 아빠가 사무치게 그리워질 것 같아서, 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