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갑갑할때는 책을 찾는다.
책 속에서 위안을 얻는 것이 아니라 책이라도 읽어야 하지 않겠냐는, 생산성에 대한 강박에서 나오는 행동이다. 지난 일요일이 그런 날이어서 나는 마을 도서관에 갔다. 대출 가능 권수 다섯권이나 세 권을 이미빌려둔 터라 두 권만 빌릴 수 있었다. 고작 두 권이라니! 무릇 리미티드란 조바심을 불러와서, 나는 괜히 발을 동동거리며 서가의 이쪽 저쪽을 기웃거렸다. 유홍준 선생님의 <국보순례>는 빼서 훑어보다 거의 다읽어버려서 다시 꽂아두었고, 조용헌의 <백가기행> 도 대각선으로 거의 다 훑고는 꽂았다. <안녕, 오케스트라>, <나는 성인이 되어 다시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등을 잔뜩 읽고 나서야 집에 갈 생각이 들었다.
두 권. 갯수로 욕심을 채울 수 없을 때는 부피로 채운다. 나는 두꺼운 명화집을 꺼냈다. 나에겐 해설의 도움을 받아 그림을 좀 더 이해하기 위해 찾는 것이 명화집이지만, 막상 펼쳐보면 해설은 잘 읽히지 않고 그림만 슬슬 훑어보기 마련이었다. 그러한 전적으로 기대감 없이 책을 펼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술술 읽혔다. 해설은 간결했고, 그것을 전하는 화자는 따뜻했다. 그동안의 명화집이나 해설서에서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었다. '엄마에게 가져다 주어야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크고 무거운 그 책을 빌렸다.
내 방에서 하룻밤 재운 그 책을 어제 저녁 김여사에게 별말없이 전하고, 오늘 아침 우리는 다시 만났다.
오랫만에 같이 밥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김여사가 말을 꺼냈다.
"너가 빌려준 그 책 있잖아"
"응, 좀 읽었어?"
어젯밤 김여사는 책이 이상케도 술술 읽히길래 그대로 술술 다 읽었다. 책을 덮고 나서는 겉표지에 가득한 꽃밭이 무척 예뻐서 따라 그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수채화 도구를 꺼내서 스케치북에 노란색을 한웅큼 칠했는데, 너무 진하길래 급히 물을 타서 노란색을 주위로 옅게 펼쳤다. 짙은 노랑을 중심으로 엷은 노랑이 점점 번져나가 스케치북을 채워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김여사는 놀랐다. 잊고 있었던 어린 날의 기억이 너무 갑작스레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너무 생생히. 대여섯살 무렵 어린 자신의 모습과, 함께 놀기 위해 자신을 기다려주던 또래의 친구들과, 그 아이들의 웃음과, 할아버지가 챙겨주던 따뜻하고 보실보실한 감자알들과, 할머니가 반들반들하게 닦아놓은 대청마루의 윤기와, 할아버지댁 앞에 흐르던 작고 깨끗한 개울과, 그 개울물 속에 담겨서 옴시락거리던 자신의 작은 두 손과, 논두렁에서 꾸물척거리던 미꾸라지와, 주홍빛으로 펄떡이던 잉어들이.. 그 눈부신 풍경과 따뜻했던 행복으로 가득했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녀는 울었다.
김여사는 일곱살까지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청도의 한 작은 마을에서 살았다. 첫손주가 너무 예뻐 잠시데리고 있으려던 것이 그렇게 몇 년이 된 것이었다. 며느리의 동의가 있었을리 없다. 며느리, 곧 김여사의어머니는 시부모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고, 뒤로도 아이가 줄줄이라 시골까지 가서 당장에 찾아올 수도 없었다. 김여사의 아버지가 찾으러 갔지만 그때마다 할아버지가 아버지의 기차시간에 맞춰 어린 김여사를 숨겼다. 대여섯해만에 김여사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지만, 집은 청도처럼 고요하지 않았다. 아래로 동생만 다섯이었다. 억세고 척박한 과수원 땅을 빌려준 돈 대신으로 떠안듯 받은 김여사의 아버지는 어떻게든 그 땅을 일구어야 했다. 그는 과수원 뿐만 아니라 다른 두 세가지 일들을 겸했다. 딸린 식구도 많았지만, 그 자신이 아버지로부터 사랑과 인정과 재산을 받지 못한 심리적 요인도 컸다.
김여사의 어머니 또한 그 모든 것들을 건사해야 했다. 뺏기듯 잃은 딸이 돌아왔다고 부둥부둥할 여유는 없었다. 외려 데면데면 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든 도망쳐나왔어야지' 하고 그 작은 아이를 원망했을지도 모른다. 그 작은 아이를 원망할만큼 연약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돌아온 작은 아이를 단지 자신의 일을 나누어 할 장녀로만 생각했다. 그 날부터 김여사가 독일로 떠나던 날까지, 김여사는 학교에 간 날보다 가지 못한 날이 많았다.
김여사는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우울감의 원인은 불우했던 유년시절이라고 종종 말했다.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의 통화는 항상 다툼으로 끝이 났다. 그런 통화마저 세월이 흐르면서 줄어들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그늘은 줄어들지 않았다. 김여사는 무던히도 지우려고 했지만, 잘되지 않아 자주 힘들어했다. 그럴때마다 나는 싱크대며 냉장고의 얼룩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박박 닦아대던 김여사의 등을 떠올렸다.
"그런데 그게 떠오른거야, 어릴 때 그 행복했던 풍경이 말야. 난 불행했다고 생각했는데, 행복했어."
나는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충격적이었다. 기적같았다. 그리고 그 기적을 김여사가 마침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감격스러워서 아무말도 할 수 없었다. 김여사는 커다란 스케치북을 가지고 왔다. 내가 스케치북에 가득 담긴 노란색을 한참 들여다보며 누구에게 향하는지도 모를 감사함을 되뇌이는 새, 김여사는 일기장에 적어둔 그 감격의 시간을 내게 읽어주었다. 대여섯살의 그녀를 행복하게 해주었던 풍경과 사람과 그들이 준 사랑에 대한 기억이었다. 어린 그녀는 따뜻함과 안정감 속에 있었다. 다 읽기도 전에 김여사는 울었고 다 듣기도 전에 나도 울었다.
나는 김여사가 당신의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기울였는지 알고 있다.
당신의 과거가 당신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날부터 그녀는 노력을 계속했다. 때로는 그 노력들이 무쓸모해보일 정도로 어려운 나날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너무 노력하는 바람에 도리어 노력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그럴때면 멈춰서서 둘러보는 법을 터득해냈다. 그렇게 그녀는 점점 더 섬세하게 들여다 볼 수 있었고 조율할 수 있었다. 그래서 노력하지 않으면서 노력할 수 있었다. 때문에, 어둡고 두터운 기억을 얇고 얇게 만들어 끝내 그 너머의 따뜻한 기억에까지 가 닿고 만 오늘은 온전히 그녀가 만든 현실인 것이다. 온전히 그녀의 공이다.
나는 어제 밤새 한잠도 못 잤다.
초저녁에 마신 커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엄마의 세상에서 밤새 일어난 거대한 균열 때문일지도, 그 마음의 야단법석 때문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무거웠던 온몸이 세상없이 가뿐해진다.
이리 가뿐한 몸과 마음으로 어머니 당신을 적는다. 이 가뿐한 몸과 마음이 엄마의 것 같아 또 눈물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