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네가 해어져도 헤어질 수 없어_ 레스포색 백팩

21세기 보부상 혹은 배가본드에게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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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극장>에서 널 촬영해서 방송한다면 제목은 "매일 짐 싸는 여자" 쯤 되지 않을까?"

추석 새해 해서 일 년에 두어 번쯤이나 집에 들르던 동생이 연휴를 보내고 다시 제 집으로 돌아갈 짐을 쌀 때면 혈육은 의례 저 말을 했다. 제목 참 잘 지었다며 나는 늘 웃었다.


스물세 살. 태어나 가장 멀리 집을 떠났고 그 이후로 집에 3일 이상 머물렀던 적이 없었다.

나는 주말이 없는 일에 몰두해있었다. 주말이 없는 일을 한다는 것은 주말마다 짐을 싼다는 것이었다. 짐을 싸고, 어딘가에 머무르다 돌아와, 짐을 다시 푼다. 짐을 싸고 푸는 일까지 하면 기분 상 일주일의 반이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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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게, 맨날 돌아다니네."

21세기 보부상이라며 동생을 늘 놀리는 혈육은 동생이 집을 떠날 때마다 동생의 짐을 들어 배웅에 나서곤 했다. 우리는 같이 공항으로 갔다가, 기차역으로 갔다가, 버스정류장으로 갔다. 그러는 사이 가방은 사람 두 명쯤 들어갈만한 이민가방이었다가, 품이 늘어나는 엄마의 낡은 캐리어였다가, 신소재로 만들어진 형광 노란색의 신상 캐리어로 바뀌었다.


그러는 동안 10년 동안 한결같이 내 등 뒤에 챡 매달려있던 가방이 있었다. 레스포색 백팩이다.

10년 동안? ㅇㅇ. 예민한 전자제품만 따로 담아 가지고 다녀야 하므로 배낭은 필수였는데, 다른 무엇을 메어보아도 이쪽으로 돌아오곤 했다.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가벼움과 뛰어난 내구성, 생활 방수력, 구김 걱정 없는 소재, 과한 디테일 없이 섬세히 나누어진 수납공간 등, 이 친구가 가진 셀 수 없는 매력은 나를 언제나 제 곁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 그렇게 나와 함께 쉴 새 없이 일한 이 가방이 낡고 닳아 다시 똑같은 모델로 새 것을 장만했을 즈음, 나는 회사를 그만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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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둔 뒤, 나는 새로이 진로탐색을 시작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갖가지 것들을 배우러 다녔다. 노트북과 카메라 대신 중국어 교재나 무용 연습용 신발이나 수영 꾸러미, 만년필과 잉크, 다양한 무게의 종이 엽서 같은 것들을 까만 백팩에 무시로 넣고 뺐다. 먹고 사는 거랑 너무 상관없어 보이는 것만 골라 배우러 다닐 때에도, 가방은 별 말없이 내 친구들을 담아주었다. 하고 싶은 일을 여전히 찾지 못했을 때에도, 그중 하고 싶은 것 비슷한 일을 찾아 다시 공부를 하게 되었을 때에도. 가방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흔한, 애정을 빙자한 허튼소리 한마디 없이 내 것이라면 무엇이든 담아주었던 가방 덕분인지 나는 직종 변경에 성공했고, 어찌 용케 잘 버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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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 잘 버텨보려고 도서관에서 공부를 좀 하고 돌아왔다.

뭐나 쓸까 하고 노트북을 들고 벽에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아까 도서관 갔다 와서 아무렇게나 던져놓은 레스포색 백팩이 어느새 나와 같은 모양으로 비스듬히 기대앉아있다. 가방을 바라보는 내 시선이 무슨 오래 사귄 벗의 옆모습을 바라보듯 한다. 그래 그랬지.. 하며 아주 옅다가도 때론 눈 앞처럼 선명한 우리의 시간들을 본다.

'뭐가 너를 그 시간 그 공간으로 데려갔을까?'

_ 뭐래, 누구겠어. 너지.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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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야, 억센 가방이 나달 나달 해져서 버릴 정도가 됐으면, 뭐 회사도 그만뒀겠다 그쯤에서 좀 쉬지, 뭘 또 똑같은걸 새로 사서 또 막 다녀. 그동안 배우고 싶었던 거 몽땅 배워보겠다고 무슨 한풀이 하듯이 돈이며 시간이며 막 써. 다시 3년도 넘은 가방이 아직도 새것 같다고 또 막 극찬 극찬을 하면서 또 막 어디를 들고 다니려고 해...

사람 참 안 변해. _


맞어. 너처럼 사람도 잘 안 변해.

근데 난 이거 괜찮은 거 같어. 막 다니는 거, 막 해보는 거, 나 진짜 쫄본데도 진짜 후달달달 하면서 막 하고 있잖아. 덕분에 별거 별거 다해봤어. 아직 못해본게 더 많지만.. 여튼 난 이거 꽤 괜찮은 것 같아.. 그래서,

잘 해어지지 않는 너처럼, 이런 나도 잘 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동안 꽤 재밌었거든. 시간 지나 이런 내가 조금씩 해어지더라도, 영영은 헤어지고 싶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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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말 끝에 가방이 푸스럭, 하고 조금 내려앉은 것 같은데.

어디 가만히 붙어있지 못할 제 운명을 체념한 때문인지 뭔지는 모르겠다만,

마, 주인이 역마라 어쩔 도리가 없다. 같이 가자, 그게 어디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