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 알레르기

성실백신 같은거.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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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나에게는 '성실 알레르기' 같은 게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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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주문한 마스크가 도착하지 않았다. 이럴까 봐 두 군데에서 따로 샀는데 둘 다 오지 않았다. 그중 한 군데는 '오후 4시 전 결제 시 당일배송' 이라고 적혀 있었는 데도 말이다. '그래, 지금쯤 불티나게 팔리겠지.' 동네 치킨집에서 주문해둔 치킨을 찾아오는 짧은 사이, 등 뒤로는 쉴 새 없이 주문 알림벨이 울렸다. 마스크도 치킨도 참 불티나게 팔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마스크 업계에 뛰어들어야 하나?'하고 0.1초 간 생각했다.


미세먼지가 너무 심해, 걸어서 10분 거리의 카페를 가지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업무가 많으니, 집이라도 게으름 없이 할 수 있을 거야 생각했다.' 업무 목록을 책상 오른쪽에 펼쳐두고 흘깃흘깃 쳐다보며 업무를 해나갔다. 적어 둔 세 가지 중 한 가지를 하다 지쳤다.


세 시간 정도는 꼼짝 않고 일하는 습관 때문이다. 그렇게 완전히 집중해버리고 나면 바로 지쳐버린다. 지속 불가능한 근무습관이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잠시 쉬고자 유튜브를 켰다. 응?


유튜브를 켜놓고서 시간은 소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강의를 찾아봤다. 아니 그렇다면 '애초부터 유튜브를 틀지를 말았어야 했던 건 아닐까' 하고 매일 밤 이불을 덮을 때쯤 생각한다.


열심히 강의를 찾아보았다. 너무 많이 봐서 또 지쳤다. 아, 이럴 땐 달달한 걸 봐야지. 단짠단짠은 시청각에서도 진리인 것이다. 네이버 TV에 들어가서 <위대한 유혹자>를 보았다. 땅콩버터를 바른 식빵을 씹으며, '예쁜 애들은 얼굴에 점도 예쁘게 찍혀있네' 하고 생각했다. 비어 가는 땅콩버터통을 보며, '이렇게 나 혼자 퍼먹을 줄 알고 안사오려고 했었지..' 하고 지난주 마트에서 장을 보던 나를 아련한 표정으로 떠올렸다.


식빵 봉지를 여미며 인스타그램을 열었다. 나에게 추천하는 피드를 둘러보다 상큼한 초록색에 이끌려 <미나리 손질법> 을 보았다. 미나리를 숟가락과 함께 물에 담가두면 거머리를 제거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리고 거머리라니, 사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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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몰랐던 나의 관심사를 나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준, 유튜브와 각종 SNS 순회를 끝냈다. 그리고 밀쳐두었던 오늘의 일과를 다시 펼쳤다. 업무와 개인 목표가 적힌 리스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난 왜 이렇게 매일 꾸준히 하는 걸 힘들어할까, 도대체 직장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할 수 있었지?' 그런 생각을 했다.


"야, '인내' 하면 신메리지." "신메리 걔는 매일매일 꾸준히 한다니까" "신메리 끈기 ㅇㅈ? 어 ㅇㅈ"

정도 말은 들어야 인간이 좀 인간답게 인생이 좀 인생답게 될 것 같은데, 도대체 끈기, 인내, 지구력 같은 건 낯설어서 말이지.. 충동, 찰나, 잠깐, 반짝. 뭐 이런 거나 익숙하고..

'성실백신' '충동면역주사' 같은 거 좀 있었으면 좋겠다, 당장 맞으러 갈 거다.


그런게 없어서 하릴없이 다시 할 일 목록을 쳐다본다. 안녕 친구들, 남은 오늘 동안 최대한 충실히 해볼게, 잘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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