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약, 엄마 얼굴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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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타서 먹으면 나을 정도의 감긴데, 병원 갈 시간을 놓쳐 꼼짝없이 그냥 드러누운 밤이었다.

종합감기약을 쓰기엔 이미 좀 심해진 상태지만 혹시나 해서 먹어보았는데 역시나 부은 목은 별 반응이 없다.

그래도 약을 먹었으면 졸려야 하는 것 아닌가? 나의 생체시계가 이렇게 강력한 것인가? 올빼미인 나는 1시가 넘어도 잠이 안 온다. 아픈데 잠까지 안 오고 내일도 여지없이 출근이니 서럽지 그지없다. 갑자기 엄마 보고 싶다. 건넌방에서 꿀잠자고 있을 우리 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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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꽤 꼬맹이일 때부터 엄마는 일을 하러 갔다. 오빠는 학교에 가고 애기인 나는 어린이집에 갔어야 했는데 어린이집 어린이들보다 한참은 더 어렸던 나는 그들의 텃세를 이겨내지 못하고 차라리 혼자 집에 있겠다고 선포를 했다. 어쩔 수 없이 부모님은 나를 집에 두고 일하러 갔다.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오다가 파도가 들려주는 자장노래... 같은 것은 없었고 그냥 집안 작은 마당을 몇 바퀴 돌다가 방안의 회전의자에 앉아 제 몸뚱이만 한 백과사전을 빼어 펼쳐보다 오빠가 올 시간에 골목길에 나가 오빠를 기다리다가 오빠가 오면 엄마가 주고 간 용돈으로 신호등 사탕 같은 것을 사 먹거나 뭐 그런 일상이었다.


엄마는 오후 늦게 집에 돌아왔다. 해가 짧아질수록 엄마가 오는 시간은 노을이 지는 시간이 되기도 하고, 어느 때는 캄캄한 기분이 드는 때가 되기도 했다. 엄마는 늘 까만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방에서 뒹굴거리다가 문간에서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소리가 나면 반사적으로 일어나 문을 열었다. 엄마의 얼굴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아기새처럼 엄마가 세상에서 사냥해 온 감이나 귤이나 떡 같은 것을 받아먹고 오동통하게 볼을 키워나갔다. 엄마는 그러고도 또 밥상을 차려주었다. 막 끓인 따끈한 된장찌개 속 감자조각들을 보슬보슬 부드럽고 달았다. 나는 밥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내 몫의 밥과 찌개를 오물오물 잘 먹었다. 엄마는 밥상을 치우고 그러고도 내 옷을 빨고 널었다. 그리고 작은 방에 이불을 깔고 누웠다. 방이 너무 작아 식구들이 똑바로 누울 수 없었다. 엄마는 조그만 내가 깔릴까 봐 늘 몸을 모로 누웠다. 한 번은 내 쪽으로 한 번은 내 반대쪽으로 밤새 몸을 끊임없이 돌려 누웠다. 나는 곯아떨어진 엄마의 등을 보면서 잠을 기다렸다. 아니 엄마의 얼굴을 기다렸다. 엄마가 다시 몸을 돌려 엄마 얼굴이 내 앞에 보이길 기다렸다. 엄마의 얼굴이 드디어 내 쪽으로 돌아오면 나는 창 밖 가로등 빛에 비춰진 엄마의 얼굴을 가만히 뜯어보다가 엄마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00아, 엄마 얼굴 만지지 마.. 엄마 못 자겠어.." 엄마가 고단한 목소리를 겨우 내면 나는 아쉬운 손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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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모로 누워 부은 목젖을 꼴깍거린다. 잠들고 나면 아픈 시간이 금방 지나갈 텐데 그 잠이 안 오니 서럽다. 갑자기 엄마 얼굴 만지던 때가 생각이 나고 갑자기 그때 엄마 얼굴을 마음껏 못 만진 게 서럽다. 하 나참. 그렇다고 지금 엄마 얼굴 만지러 엄마방으로 갈 수도 없고..


그래서 휴일을 맞은 오늘은 내 방 춥다는 핑계로 엄마방에 가서 하루 종일 놀았다.

엄마 방에 있는 각종 건강기구들을 한 번씩 하고 빌려온 책 여덟 권을 엄마 이부자리 한편에 쌓아두고 이 책 읽다 저 책 읽다 하면 엄마는 신나게 유튜브를 보다가 책을 보다가 한 번씩 이부자리 내 옆에 와서 한잠 자고, 자다 깨면 같이 수다를 떨고, 그러다 식사 때가 되면 같이 부스스 부엌으로 가서 있는 반찬을 꺼내 대충 배부르게 먹었다.


감기는 아직 낫지 않았고 기대와는 다르게 처방전으로 받은 약을 먹어도 졸리지 않지만,

오늘은 잠이 오지 않아도 서럽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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