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이 매니저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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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이 부을 것 같은 찜찜한 기운이 느껴진다. 따뜻한 차나 마시면 좋을 텐데, 이럴 때는 깔루아나 그 친구인 베일리스 비슷한 걸 사오게 된다. 어제는 보드카 머드쉐이크를 사 왔다. 초코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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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 동네 맥주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술을 좋아하니까 맥주집에서 일하면 맥주에 대해 좀 알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맥주집은 동네에서 가장 잘되는 가게였다. 들어가기 전에 알았으면 안 했을 것이다.
그 곳에는 예쁜 여사장과 잘생긴 남사장과 또 잘생긴 남자 매니저가 있었다. 알고 보니 모두 가족이었다. 심지어 주방 이모는 여사장과 매니저의 어머니였다. 들어가기 전에 알았으면 안 했을 것이다.
저녁 8시부터 새벽 3시까지 숨 쉴 틈 없이 돌아가는 가게였고,
가족 간에는 일을 많이 시키지 않아, 가족이 아닌 나와 다른 알바생 하나는 죽을 맛이었다.
잘생긴 남자매니저는 일을 잘했다. 센스가 좋을 뿐더러, 손님들에게는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싹싹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내 간을 빼갈 것 같은 인간이었다. 그간 눈치가 빠르고 행동도 빠릿빠릿하다는 평가를 받으며 살아왔던 나지만, 매니저의 썽에는 차지 않았다. 아 생각하니까 또 열받..
그랬던 그가 내 인생에 남겨준 기억이 하나 있다. 그를 생각하면 그저 열받을 뿐이지만, 그 기억은 나의 습관이 되었다. 삶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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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짜리 음력 설 연휴를 앞둔 날이었다. 몸이 안 좋았지만 곧 연휴니까 그냥 일했다. 일을 마치고 퇴근하려는 길에 그가 나더러 아파 보인다고 했던가, 무슨 말 끝에 내가 좀 아프다고 했던가, 여튼 몸이 안 좋다는 말이 나왔다.
'아 또 뭐가 아프냐고 쿠사리나 주겠지' 하고 괜한 말을 꺼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그가 손님에게만 내보이는 그렁그렁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칵테일 한 잔 마시고 푹 자면 개운한데, 한 잔 만들어 줄까?"
'지금까지 저 거부할 수 없는 눈망울로 수없이 많은 맥주를 팔아 치웠겠구나' 하는 생각과 동시에, 나는 몸에 새겨진 을의 자세로 "네.." 하고 순순히 대답했다. 그는 술병이 가득한 바로 자리를 옮겨 능숙하게 칵테일을 만들기 시작했다.
순한 목소리로 '네' 라고 대답한 나 자신에게, '저 흉포한 매니저놈에게 너와 나의 거리감을 재차 인지시킬 수 있도록 철저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태도를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그걸 날려먹다니' 하고 비난을 퍼부으며 나는 그가 칵테일 만드는 모양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마셔, 맛있을 거야"
나는 '맛없다고 하면 연휴 끝나고 다시 내 목을 비틀겠지?' 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한 모금 마셨다.
'아우 써.. 음? 맛있네?'
맛있었다. 맛이 없었어야, 아니면 맛이 없는 척이라도 했어야 저 악랄한 매니저놈에게 복수 비슷한 거라도 하는 건데, 이미 표정에서 다 드러났던가보다. 매니저는 '훗' 하는 뿌듯한 표정과 '풋' 하며 풋내기를 보는 듯한 표정을 섞어 보이며 "거봐, 맛있지?" 라고 나에게 으스댔다. 분명히 으스대는 표정이었다!!!
"네. 맛있어요." 잔을 깨끗하게 비움으로써 나는 나의 패배를 증명했다.
"제가 원래 술을 좋아해서요" 하고 새침한 표정으로 신소리라도 갖다 붙일 수 있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래 봐야 이미 완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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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기운 때문인지 몸살기 때문인지 패배감 때문인지, 나는 몽롱한 상태로 집에 왔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그리고는 계속 앓았다. 이상하다, 매니저가 그거 마시고 한잠 자고 일어나면 개운하게 낫는댔는데.. 나는 고열 속에서 온 더 락 잔에 담긴 투명하고 또 흑갈색이었던 칵테일을 떠올렸다.
'그거 이름이 블랙러시안이었지? 블랙러시안, 블랙러시안...'
까먹지 않으려고 자다 깰 때마다 칵테일의 이름을 되뇌었다.
설 연휴 내내 자리보전을 했다. 연휴가 끝나며 몸살도 끝이 났다. 사흘이 넘는 연휴를 아픈데 소진한 것이 분하고 서러웠다.
연휴가 지나고 그곳에서 한 달인가를 더 일했다. 그리고 그만두었다. 왜 그만뒀더라.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 매니저도 싫었을 테고, 퇴근길에 변태도 한번 만나고, 그런 이유들이 있었을 것이다. 결정을 내리게 했을, 당시로서는 중요했을 여러 이유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칵테일은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습관이 되어 이제껏 남아있다. 삶이란 참 기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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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아플 때면 블랙러시안과 그 안에 들어있던 달콤한 깔루아를 떠올린다.
매니저 말대로 한 잔 쭉 들이켜고 푹 자도, 몸살은 낫지 않는다는 걸 잘 아는데도 그런다. 마시면 오히려 염증이 더 올라오는데도. 그걸 아는데도 그렇게 마트에서 집어온다. 왜 그러는지 이유를 잘 모르겠다.
가만, 염증이 더 올라오는데도? 그러게, 염증이 더 올라오는데? 그러게, 그때도 분명 사흘이나 아플 정도는 아니었는데.. 응? 야이 매니저놈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