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의 맛

도와주든동.

by 릴리슈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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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의 마지막 끼니는 과일야채유동식이다.

과일과 야채를 오래도록 끓인 일종의 죽 같은 것이다.

김여사가 공들여 만든 이 유동식은 밀려오는 허기를 능숙하게 달래주고, 피로를 조금 더 손쉽게 풀어주며, 잠을 조금 더 빨리 불러오고, 딱딱한 장을 말랑하게 해준다. 그래서 매일 밤 약을 먹듯 챙겨 먹는 유동식.


그런데 그저께 밤. 유동식을 가득 담은 통을 밤새 싱크대 위에 내버려두었다. 냉장고에 넣는 것을 깜빡한 것..

슬쩍 맛을 보니 괜찮아서 다행이다 했는데, 세 숟갈쯤 더 먹어보니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갔어..'

맛이 갔다. 그러나 어떤 조치를 취하기엔 귀찮았고, 정성을 쏟은 김여사를 생각하면 도저히 버릴 수는 없어

그냥 다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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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밤이 되었다. 유동식을 먹는 밤.

수영 후라 너무 피곤한데, 냉장고에 도사린 시큼한 한 통의 죽을 그냥 둘 수는 없다. 어떻게든 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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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더운 여름이면 가스레인지 위에 둔 국 같은 것들이 한나절만에 살짝 맛이 변하곤 했다.

내가 좋아하는 미역국의 미역들이 더위에 조금 더 흐늘흐늘해지려 하면 슬펐다. 바쁜 엄마가 만들어 준 국인데..

시무룩해졌던 그때 엄마가 말했다.

"아주 살짝 맛이 간 건 바로 팔팔 끓이면 괜찮아져. 지금 바로 팔팔 끓여."


나는 우주왕복선이라도 보낼 기세로 가스레인지의 불을 가열차게 댕기고, 냄비 속을 지켜보았다.

팔팔 끓어오르는 것을 몇 번이고 확인한 다음 불을 껐다. 맛을 보았다.

'아, 돌아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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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미역국 CPR에 성공했던 기억이 나, 이 야채죽도 팔팔 끓여보았다.

싱겁게도, 아니 다행히도 새콤해지려던 맛이 사라지고 원래의 맛으로 돌아왔다.

다시 김여사와 나의 몫을 떠, 우물우물 삼켰다.

이렇게 살아난 것이 반갑고 고마워, 저 뜨거운 열기에게 감사한 마음을 보냈다.

그리고 문득, 상하려는 죽을 되돌려준 뜨거운 열기 같은 존재가, 상하려는 영혼에게도 있을까 생각했다.


있을까?

조금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있다면 예술이 아닐까, 반드시 예술일 거라고 생각했다. 물론 예술 같은 생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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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큼해지려는 나를 원래의 맛으로 돌려놓는, 내가 아닌 것으로부터 나를 떠나게 하고, 나인 곳으로 나를 데려오며, 축축함에서 나를 건져내어 끝내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하는,

수많은 세상의 예술가들과 삶을 예술처럼 살았던 강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내가 뭐 하나 해준 게 없네?

두 손에 죽이 있으니 이 따뜻한 야채죽 한 그릇이라도 바친다.


그리고 죽 한 사발 올린 김에 감히,

'나도 좀 그렇게 살고 싶은데요, 좋은 기운 좀 주시죠들.' 하고 한마디 끼워 올린다.

나는 죽 한 사발 내놓고 저들에게는 좋고 큰 거 달라고 하니 협잡꾼이 따로 없지만,

좀 뻔뻔해져볼까 한다. 이제는 뜨겁게, 상하지 않게, 뻔뻔하게 살아볼까 한다.

그러니, '맘에 들면 좀 도와주든동.'





어제와 오늘, 나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은

<거울 속의 거울>.


Arvo Pärt, <Spiegel im Spiegel>






물론

조금 이상한 데로 데려가는 예술가도 가끔 있다..


Steve Park, <뽀롱뽀롱 뽀로로 (오프닝)>


아름다운 재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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