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한 자루가 건넨 봄

by 꽃빛달빛

한참 동안을 무기력에 빠져 보냈다.


무기력을 부정하기 위해 억지로 공부도 해보고,

사람을 만나는 것도 무서웠으면서 일부러 사람들 사이를 찾아가 대화도 해보았다.


그렇지만 나의 겨울잠은 영영 끝나지 않는 듯했다.


매일 밤 달빛에 비친 그림자는 괴물처럼 나를 잡아먹으려 들었고,

계속해서 드는 불안한 생각에 나는 이불속에 몸을 더 웅크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아니. 그렇다고 믿었다.

그렇게 나를 꽁꽁 싸맬수록 내가 안전해질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다 어제 새벽 지인에게 너무 힘들다고, 우울함에게 잡아먹힐 것만 같다고 정말 오랜만에 이야기를 했다.


그분이 내게 해주신 말씀은 예상과는 너무 반대였다.


"내일은 책 한 권? 아니다. 정말 연필 한 자루라도 좋으니까, 나가서 연필이라도 사 오세요."


"제가 말로만 하면 또 안 나가실 거니까. 내일은 저한테 영수증 찍어서 보내주세요."


"전 영수증 아니면 안 믿을 거예요! 진짜 뭐라도 사서 영수증 보내주세요!"


솔직히 평소의 나였으면 나가기 싫다고 했을 듯한데...

내게 주신 말씀에 진심이 너무나 느껴져서 알겠다고 나도 모르게 확답을 해버렸다.

내일은 꼭 나가겠다고.


그렇게 새벽이 흘러 오늘이 되었고,

나는 미루고 미루다 결국 밖으로 나왔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은 아직 춥고 생명의 기운이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곳이었는데.

내가 웅크리고 겨울잠을 자는 사이, 많은 것이 달라져있었다.


새들이 날아다니고, 작은 개미들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푸른 잎들이 거리를 덮고 있었고, 따스한 햇살이 내 피부를 쓰다듬었다.


지금껏 내가 알고 있던 겨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더 이상 웅크리지 말고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라는 것처럼 말이다.


연필 사 오기는 이제 핑계에 그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 밖을 돌아다니며, 수많은 생명체들의 움직임을 구경하고.

홀린 듯이 찰나의 기록으로 남겼다.



민들레.jpg
까치.jpg
민들레2.jpg
오늘의 기록

내가 본 순간은 누군가에겐 지나가는 어떤 풍경의 일부였을지도 모르지만.

내겐 이제 세상은 조금 더 따뜻해졌으니, 조금 더 나가하고픈 것을 해보라는 메시지로 들렸다.


나 혼자 웅크리고 아파하는 그 시간 동안 바깥은 많이 달라져있다는 걸 나만 몰랐다.


아직도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펼쳐져있고, 날카로운 바람이 얼굴을 할퀴고 지나갈 것만 같았는데.

그런 시간은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앞으로는 나를 방이라는 작은 새장에 가둬두지 말고,

좀 더 많이 밖으로 나가봐야겠다.


나를 무기력에 가둬둔 사람은, 누구도 아닌 나 스스로였고
그 새장을 열 수 있는 열쇠 또한 내 손에 있었다.


나에게 연필 한 자루라는 이름의 활기를 건네주신 그분께,

조용히 감사한 마음의 인사를 전한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거짓된 겸손이 만든 우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