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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TSD, 트라우마 장애가 있으신 분들은 읽기를 조심해주세요.)

by 소란화

'나만이 쓸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에르노, 2018:61). 김명찬 저, <자문화기술지의 이해와 실제> 425페이지 재인용.


소란화야 안녕! 잘 지냈니? 우리 정말 오랜만이다, 그치. 나는 아이 키우고 적당히 하루 하루 살아내는 중이야. 너는 어때? 오늘도 잘 다녀왔니? 학교가 끝나면 보통 세시 반 정도 되곤 했지. 지금쯤 집으로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겠구나. 열여섯의 너는 기운찬 발걸음으로 언덕 따위 얼마든지 올라주겠다는 양 마구마구 걸어가고 있을까? 아마 아닐 것 같아. 집으로 가는 길이 천근만근이겠지. 그곳에 도사리고 있는 어둠을 마주하는 일이 너무나 싫어서. 그 어둠이 차라리 '아무도 없음'이라면 그나마 다행이겠지. 하지만 그 어둠 속엔 언제나 그가 있었어. 오늘도 그가 있을까? 네 아빠 말이야.


집에 있는 아빠들은 무얼 할까? 다양한 걸 할 수 있을 거야. 하교하는 딸과 아들을 위해 따끈한 밥을 지어놓을 수도 있을 거야. 아니면 조용히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등 자신만의 시간을 즐길 수도 있을 거고. 아니면, 다음 취업 자리를 알아보러 박람회에 나가거나, 사업 구상을 하고 있을 수도 있겠네. 운동을 좋아하는 아빠들은 TV 속 헬스 트레이너의 움직임에 맞춰 으쌰으쌰 땀을 내고 있을 수도. 그도 아니면, 그냥 쿨쿨 자거나. 그런데 소란화, 네 아빠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그는 대체 어떤 상태였기에, 학교에서 돌아온 네게 그런 짓들을 한 걸까? 열여섯의 너는 무서웠지. 아빠가 참 무서웠어. 언제든 방문을 열고 들어올지 몰라. 네 방문은 항상 굳게 잠겨 있었어. 하교 후 집에서 낮잠? 꿈도 못꾸지. 침대 아래에는 언제나 식칼이나 날카로운 컴퍼스가 자리해 있었어. 유사시를 대비해서이지. 다른 어느 곳도 아닌 바로 네 집, 네 방에서 말이야. 너를 사랑하는 부모님이 너를 보호해주기 위해 만든 네 장소에서 말이야. 소란화 네게, 아빠는 마치 하이애나 같은 존재였어. 무언가를 호시탐탐 노리는 게걸스럽고 혐오스런 짐승. 네 아빠가 딱 그랬어. 아빠는 무엇을 노리고 있었을까? 소란화 네게서 무엇을 얻기를 바랐을까? 엉덩이? 가슴? 소란화 너는 아빠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그로부터 수 년이 흘러, 네 나이의 두 배 하고도 더 많은 시간을 살아낸 후 어느덧 새로운 생명까지 만들어 직접 길러보니, 답은 더욱 모호하게만 느껴질 뿐야. 세상 그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을 그렇게 대할 수 있단 말일까. 아이에 대해 조금만 귀찮거나 화가 나는 감정이 들어도 금방 미안해지고 죄책감이 드는 것이 바로 부모인데, 어떻게 해서 소란화 너의 아빠는, 그토록 오랫동안, 널 그렇게 아프게 할 수 있었을까. 차라리 아빠가 친부가 아닌 양부였다면, 소란화 너의 충격도 조금은 덜어졌을까. 참 희한하다. 아기 소란화가 꼬물거리며 웃고, 침을 흘리고, 아장아장 걷고, 부모를 향해 한없이 어리광을 부리고 미소를 짓고 옹알이를 해대던 그 시절을 그는 기억하지 못했던 걸까? 그에게 소란화 너는 잡지에 나오는, 영상에 나오는, 그런 감정도, 삶도, 자아도 없는, 발가벗고 교성을 질러대는 이미지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밖에 인식되지 못했던 걸까? 그러니까 결국, 소란화 너는 네 아빠에게 한낱 물건이었던 걸까?


물건. 열여섯의 너는 너무 빨리,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물건으로 대하는, 그것도 소중한 물건이 아니라 언제든 쓰고 버려버리는 천원짜리 싸구려 물건으로 대하는 법을, 다름 아닌 너 자신의 아버지를 통해 알고야 말았다. 그건 어떤 기분이었을까, 소란화야? 너는 정말 어땠을까? 열여섯의 너는, 아니, 그 일이 시작된 열하나의 너는,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악몽 속에 하루 하루 전쟁을 치르듯 살아낸 너는, 매 순간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신으로 버텨냈을까? 아무에게도, 사실상 스스로에게도 솔직할 수 없었던 너는, 그 모든 어둠과 비밀을 작은 가슴에 품고 행여 밖으로 터져나갈새라 꾹꾹 눌러담고 있던 너는, 대체 어떤 힘으로 그 시간들을 거쳐온걸까?


한날, 아이를 재우고 창문 가득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에 잠시 눈을 감고 있었어. 아이 얼굴에 햇빛이 묻어 있는 걸 보았다. 눈을 찡그리는 걸 보니 귀엽기도 했지만 겨우 든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손을 모아 아이 얼굴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어린 시절의 그늘이란, 어둠이란 사실 이런 것이어야 했는데. 세상의 오만 것들, 설사 그것이 따스한 햇살이라 할지라도, 너무도 눈이 부셔 고통스럽다면 손차양을 만들어 자식을 보호해주는 일. 나는 그런 그늘을, 어둠을 가져보지 못했다. 나의 부모는, 나의 아비는, 소란화의 아비는, 자식을 보호해주기는 커녕 뜨거운 태양볕에 털끝까지 남김없이 태워 없애버리고자 했다.


소란화야, 열여섯의 소란화. 시지프처럼 큰 짐을 지고 집으로 가는 언덕길을 힘겹게 오르던 소녀. 시지프에게는 근사한 근육이라도 있었지, 네게는 근육은 커녕 온통 공포와 두려움, 체념밖에 없었지. 그럼에도 그 언덕을 끝까지 올라주어서, 매일 같이 등교를 하고, 하교를 하고, 밥을 먹고, 잠을 자고, 네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해주어서, 아니, 너무나도 훌륭하게 해주어서, 그런 시간 속에서도 전교 1등과 각종 수상과 그 모든 성취를 다 해내주어서, 정말로, 정말로,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나의 영원한 어린 소녀. 강인한 소녀. 대견한 소녀.


우리의 이야기는 이제 겨우 시작되었을 뿐이야.


피와 아포리즘을 사용해서 글을 쓰는 작가는 읽히기를 원하는 게 아니야. 암송 되기를 원하는 거지(니체, 2007: 103). 김명찬 저, <자문화기술지의 이해와 실제> 411 페이지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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