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 개폐

by 소란화

한날,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복도 한가운데 멍하니 서 있었다. 항상 습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창문 아래로 시선을 주니, 거대한 초록빛 종량제함이 어김없이 그곳에 나와 있었다. 맞다, 오늘 버리기로 했었지. 집에 두고 온 빵빵한 쓰레기 봉투를 머릿속에 떠올렸음에도 구태여 다시 현관문을 열고 가지러 다녀올 생각은 하지 않았다. 아무런 동작도 하고 싶지 않을만큼 추운 날씨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별안간 새로운 것이 문득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자동 개폐. 스위치. on/off. 환기. 수동모드. 누르지 마시오.' 창틀에 적힌 깨알같은 하얀 글씨. 너무도 작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거기 있는지도 모르고 지나치기 쉽지만, 필요시에는 누구나가 언제고 정확히 확인할 수 있을만큼 정자로 또박또박 프린팅된 글씨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속으로 글씨들을 이렇게도 읽어보고 저렇게도 읽어보았다. 자동 개폐. 온앤오프. 수동모드. 누르지 마. 스위치. 환기. 개폐. 자동과 수동. 세상 무의미하고 한치의 재미도 찾을 수 없는 글. 오로지 실용적 목적 단 하나를 위해 거기 그렇게 지루한 모습으로 박혀있는 글. 그러다가 퍼뜩 깨달았다. 우리 할머니는 이제 이걸 읽을 수 없다는 걸. 지난해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에게는 다시는 이런 단순하고 무의미한 글자조차 읽을 기회가 없다는 걸. 손주의 두 눈을 바라보던 다정한 눈빛도, 친구의 전화번호를 컴퓨터 사인펜으로 시원시원 써내려가던 손도, 이제 이곳에 없다는 걸. 나와 함께 소리 내어 '자동 개폐. 스위치. 온앤오프. 수동모드' 더듬더듬 발음할 입도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창문에 적힌 지루하고 텁텁한 이 문구도 어디까지나 살아 있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어쩐지 아파트 복도 창문 앞에서 나의 살아있음과 할머니의 돌아가심을 새삼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0 to 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