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내게 남긴 것

(*주의: 트라우마를 자극할 수 있는 내용이 들어있음. 그리고 매우 김)

by 소란화

이 글을 쓰기까지 무려 이십여년이 걸렸다. 나는 어른이 되면 익명의 사람들 앞에 나의 이야기로 서고 싶었다. 왜 굳이 어른이 되어서 그러려고 했을까. 어린 아이가 말하기엔 다소 껄끄러운 부분이 있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우리 아버지 이야길 해야겠다. 나의 아버지는 지금쯤 아마 지팡이를 짚은 백발 성성한 노인이 되어 있을 거다. 그는 평범한 직장생활을 했고 그러다 사업도 조금 시도했지만 모두 신통찮았다. 경제력도, 자신감도 그다지 좋지 않았던 아버지는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어렸을 적 나는 그를 많이 좋아했다. 밤늦게 돌아오면 옷에서 나는 차가운 담배향이 좋았다. 엄마에겐 없는 까슬까슬한 수염도, 꼬불텅거리는 다리털과 냄새나는 양말도. 내겐 그다지 특별할 것도, 나쁠 것도 없는, 하지만 나름대로 사랑스러운 면이 있는 그런 아버지였다.


어떤 아버지들은 엄하고 독한 생활력을 물려준다고 한다. 또 다른 아버지들은 자신만의 개똥철학을, 또 어떤 아버지들은 그저 많고 많은 유산을 물려준다고 한다. 돈은 없어도 건강한 신체와 긍정적인 성격을 물려주는 고마운 아버지도 있을 것이다. 내 아버지는 지금 죽는다 해도 내게 남겨줄 것이 없다. 법적으로 우린 이제 남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내게 분명 무언가를 남겨주었다. 나는 이미 그로부터 무언가를 받았다. 이 글은 그 무언가에 대한 것이다.


나름대로 괜찮았던 아버지는 내가 한 뼘, 두 뼘 자라날수록 점점 곤란한 존재가 되어갔다. 그는 한 사람의 성인으로서 독립적으로 굴지 못했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았고, 사람들과 만나지 않았으며, 일도 하지 않았다. 그의 주요 일과는 책상 앞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일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다. 밤에는 더욱 이상해졌다. 그는 내 방을 몰래 기웃거렸다. 잠든 나를 훔쳐보았다. 밤중의 이상 행동은 벌건 대낮에도 이어졌다. 그는 나를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상한 태도로 쓰다듬었다. 이상한 어투로 말을 건넸다. 사태를 파악한 나는 그와 거리를 두었다. 다른 가족들에게 구조 요청을 하기까지 7년이 걸렸다. 아버지는 평생 내게 한 발자국도 가까이 다가오지 못한다는 조건을 수용하고 우리 가족으로부터 영영 추방되었다.


처음엔, 내가 그로부터 받은거라곤 폭력의 기억과 상처 뿐이라는 생각에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가 내게 준 것은 '말할 수 없는 비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해야만 하는 비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내가 처음으로 이 일에 대해 느낀 감정은 무엇보다 '답답함'이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라면 그 어떤 것도 주변 사람들과 무람없이 나누고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던 내게, '남들과 공유해선 안 되는' 무언가가 있다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이었다. 남들에게 이야기해선 안 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은 곧 '수치심'이 된다. 한 가정 안에서 벌어지는 여러 일들에 대해 자연스럽고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 있었다면, 어린 나 혼자서 7년이나 고민하고 또 앓을 필요는 없지 않았을까.


나는 그 매커니즘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자녀에게 성적인 욕망을 느끼는, 사람들이 말하는 소위 '짐승만도 못한' '추악한' 바로 그 매커니즘 말이다. 아버지가 왜 그렇게밖에 행동할 수 없었는지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나는 그가 내게 전혀 미안해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분명한 건 하나 있다. 그가 자기 자신의 삶을 완전히 망치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자녀인 나의 삶도 완전히 망가뜨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그는 내 삶을 망가뜨리지 못했다. 물론 그의 행동이 내 신체와 정신에 끼친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경제적으로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거식증, 신체화장애, 강박 및 불안장애를 치료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그럼에도 나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기어코 말할 용기와 뱃심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했다. 이건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우리 사회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는 일'로 만드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겪은 문제는 누구에게나 벌어질 수 있다. 애초에 그렇게 난리치며 '타자화othering'할 일이 아닌 것이다. '우리 가족은 안 그래~' '당한 여자/남자가 잘못했겠지~' '사이코패스한테 당한거야~' '이제 저 식구들이랑 말도 섞지 말자. 더럽고 구역질나.' 내게 일어난 일에 대해 사람들이 무심코 던졌던 말들은 아버지가 내게 준 상처만큼이나 깊고 아팠다.


말할 수 없었던 것을 말하고 나면 필연적으로 다가오는 감정이 두 가지 있다. 바로 해방감과 불안감이다. 드디어 말이 내 입 밖을 벗어났다는 해방의 탄성 뒤로, 아니나 다를까 무섭게 달려드는 거센 불안의 파도. 그러나 오늘은 새로운 한 가지가 더 느껴진다. 바로 '열망'이다. 나와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다는 진실된 마음. 해방감과 불안감에 열망이 더해지니 지금 내 속은 용광로처럼 부글거린다. 그런데 나쁘지 않다. 이처럼 거대한 용광로 속에는 담지 못할 것이 없다. 다른 사람들의 속이야기, 내가 미처 다 말하지 못한 내 이야기, 그리고 우리들 모두의 '말할 수 없는 비밀' 이야기. 다 담아 푹 고아내면 무엇이 만들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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