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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묵은 때

by 황현경

빨래

이해인


초록색 물통 가득

춤추며 일어나는 비누거품 속에

살아있는 나의 때가

울며 사라진다


나는 참 몰랐었다

털어도 털어도 먼지 낀 내 마음속

너무 오래 빨지 않아

곰팡이 피었음을


살아있는 동안은

묵은 죄를 씻어내듯

빨래를 한다

어둠을 흔들어 헹구어 낸다


물통 속에 출렁이는

하늘자락 끌어올려

빳빳하게 풀 먹이는

나의 손이여


무지개 빛 거품 속에

때 묻은 날들이

웃으며 사라진다


-<내 혼에 불을 놓아> 이해인 제2 시집 분도출판사(1986년 19판)-



고등학생 때 모래내에서 살았다. 방 두 칸 연탄보일러 언니, 오빠와 남동생 네 식구가 살았다.

직장에 다니는 언니, 오빠는 늘 바빴다. 1970년대 후반 공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시절 야근은 밥 먹듯 했고 주말도 없었다.

주말에 쉴 수 있는 학생이었던 나. 빨래는 언제나 내 몫이었다.

세탁기도 더운물도 고무장갑도 없이 주말이면 언제나 빨래를 했다.

청바지는 마당에 있는 수돗가에 펼쳐놓고 비누칠을 한 뒤 솔로 박박 문질러 빨았다.

봄이 오고 날이 따뜻해지면 이불 홑청을 뜯어 빨래했다.

커다란 고무대야에 세제를 풀고 물을 받아 이불 홑청, 베개 홑청을 맨발로 밟았다. 발끝으로 전해지는 차가운 기운이 더 올라오지 못하게 힘차게 빨래를 밟았다.

몽글몽글 거품이 나면서 검은 때가 나올 때까지 밟고 또 밟았다.

밟을 때마다 둥실둥실 떠올라 퐁 터지는 비눗방울에 무지개가 따라 나왔다.

검은 때를 물을 부어 여러 차례 헹구어 내고 마당에 빨래를 널어놓으면 볕 좋은 날 저녁때쯤 보송보송 말랐다. 섬유유연제도 없었지만, 세탁비누 냄새, 가루비누 냄새가 묻어났다.

물 냄새, 햇살 냄새 빨래에서 나는 싱그러운 냄새.


결혼을 하고 시댁에 내려가서 시부모님 빨래를 했다. 그곳은 집 근처에 깊고 폭이 좁은 도랑이 있었다. 빨래하기 좋게 빨래판 같은 넓적한 돌도 있었다. 돌 위에 빨래를 펼치고 세탁비누를 문질렀다. 북적북적 빨래를 비빌 때마다 잔잔한 거품이 나왔다. 때가 빠질 때까지 빨래를 비벼 빨고 흐르는 냇물에 빨래를 담그면 세차게 흘러가는 물결이 순식간에 빨래의 때와 거품을 거둬가 버린다. 내 마음도 오래도록 빨지 않아 곰팡이가 피었을까?

나는 참 몰랐었다/털어도 털어도 먼지 낀 내 마음속/너무 오래 빨지 않아/곰팡이 피었음을


내 마음의 케케묵은 때도 비누칠해서 흐르는 물에 담그면 씻어 가 버릴까?


묵은 죄를 씻어내듯/빨래를 한다/어둠을 흔들어 헹구어 낸다


묵은 때를 비눗방울 묻혀 씻어내고 보송보송 비누 냄새나는 잘 마른빨래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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