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희망의 빛
우울증으로 점철된 20대를 보내며 약이란 나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많게는 하루 4번, 적게는 하루 2번씩 약을 꼬박꼬박 먹다 보니 이젠 약을 먹는 게 습관이 된 듯하다. 약은 증상에 따라 그때그때 용량이 늘기도 하고 줄기도 하며 종류가 바뀌기도 한다. 나 같은 경우는 맞는 약을 찾기 위해 계속 약을 바꿔보다가, 작년 여름 무렵 맞는 약을 찾은 이후부터는 같은 종류의 약을 유지하고 있다.
하루 3번씩 먹던 약을 2번으로 줄인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3주에 한 번씩 보던 진료 역시 한 달에 한 번으로 간격이 늘어났다. 잘 맞는 약도 찾았고 약을 먹는 횟수도 줄었겠다, 이대로 쭉 현상유지만 해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그리고 내 소망대로 그 후로 반년은 더 나빠지지 않고 꾸준히 현상유지를 했다. 더 나빠지지도, 그렇다고 더 좋아지지도 않기를 반년. 매번 똑같은 처방전에 익숙해질 무렵 주치의 선생님께서 조심스럽게 내뱉으신 한 마디.
“약을 한 번 줄여볼까요?”
나 같은 경우는 약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라 작은 변화에도 상태가 휙휙 잘 바뀌곤 한다. 그래서 상태가 괜찮아져도 쉽사리 약을 줄일 엄두를 못 내곤 했었는데, 이번에 주치의 선생님께서 아주 반가운 말씀을 해주신 것이다. 작년 여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고 이제 안정기에 접어든 것 같으니, 조심스럽게 약을 줄여보자는 것. 힘들었던 지나간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안정적인 상태를 유지한 지 반년. 마침 지금 남자친구와 연애를 시작한 무렵과 시기가 일치한다. 정서적으로 많이 힘들던 시절에 지금 남자친구를 만나 큰 안정을 얻었다. 아마 남자친구가 없었다면 나 홀로 더 긴 시간을 방황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그랬겠지.
공기가 따갑게 느껴질 정도로 숨 쉬는 것 마저 힘들었던 시기, 어떻게든 시간을 이겨내기 위해 억지로 취미를 만들어냈었다. 시집 읽기, 십자수 하기, 입욕제 풀어서 반신욕 하기 등. 그래도 시간이라는 게 영영 내게는 친절하지 않던 시절이었는데, 그때 남자친구를 만나 함께 여기저기 놀러도 다니고 시간을 보내면서 조금씩 극복해냈다.
약을 줄여보자는 주치의 선생님의 권유는, 내가 많이 나아졌음을 증명하는 동시에 우리의 연애가 무탈히 잘 흘러왔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물론 싸우는 순간들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가 내게 큰 정서적인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는 게 증명된 기분이랄까. 그래서 주치의 선생님의 권유가 더없이 기뻤다. 남은 평생을 우울증 약과 함께 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약을 줄인다니. 언젠가 먼 미래에 약을 완전히 끊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에 휩싸였다. 그래, 언제가 될진 모르겠지만 더 이상 약과 친하지 않게 될 날이 올 때까지 부지런히 몸과 마음을 챙겨야지. 어쩌면 그날이 그리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함께 또 한 번 약을 챙겨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