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는 것
어쩌다 시간이 맞아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 오전엔 사무실에서 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나서 친구의 집에 가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대략 1시쯤이 되었다. 이제 막 출발을 하려던 때, 친구에게서 3시까지밖에 시간이 되지 않는데 괜찮겠냐는 연락이 왔다. 오후에 병원을 갔다가 남자친구를 만나러 가기로 했다는 것이다. 며칠 전부터 나를 만나기로 한 날이었는데 다른 일정을 또 잡다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잠깐 시간을 빼서 근처에서 보는 것도 아니고 친구의 집까지 가는 건데 겨우 2시간 남짓이라니. 저녁까지 신나게 수다를 떨려던 나의 계획이 어그러지는 순간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해보니, 병원을 미리 예약해둔 건 아니고 굳이 오늘 가야 하는 것도 아니니 다른 날에 가도 상관은 없다고 했다. 그래도 저녁에 남자친구와의 약속이 있으니 5시쯤에는 출발해야 하는 상황. 친구가 병원에 가지 않는다면 4시간의 시간이 확보가 되었다.
하지만 시간의 문제를 떠나, 나와 약속이 되어 있는 날에 다른 일정을 또 잡았다는 게 마음이 상하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보통 만나면 한나절을 수다 떠는 사이인데 고작 2시간으로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 걸까. 한 번 마음이 상하니 그동안 마음이 상했었던 사소한 일들까지 모조리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그래 그땐 그랬고 이땐 이랬지. 이런 마음으로는 친구를 봐도 즐겁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한참을 뚱한 표정으로 가고 있는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남자친구를 사귄 지 얼마 안 됐으니 지금 이맘때쯤이면 시도 때도 없이 보고 싶을 수도 있지. 원래 연애라는 게 누군가를 만나는 동안에는 그 사람이 최우선 순위가 되는 거니까. 이해해보려는 자아와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는 자아가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다 문득, ‘굳이 이해하거나 이해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골라야만 하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각자 경험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친구에게도 내가 그랬던 순간이 있었겠지. 어차피 이해할 수 없는 일. 그렇다면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은 어떨까. 이해되지 않는 것을 굳이 이해하려고 애쓰는 대신, ‘아 이 사람은 이렇구나’라고 생각하고 넘기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누구나 이해되지 않는 구석은 있으니까. 나라면 이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 같지만, 모두가 나와 같은 사람은 아니니까.
굳이 이해하려 애쓰는 것을 멈추자 친구의 집에 가는 길이 가벼워졌다. 그래 이 친구는 그럴 수도 있지. 사실 돌이켜보면 마음이 상했던 기억 보단 좋은 기억이 훨씬 더 많은 친구였다. 어차피 친구가 오늘은 병원에 가지 않겠다고 했으니 4시간 정도는 함께할 수 있을 터. 그 정도면 밀린 수다를 떨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원래 결과가 좋으면 다 좋은 거라고 했다. 괜히 사소한 일로 마음이 상해서 소중한 친구와 싸운다거나 하는 일이 생기면 낭패였다.
마음을 풀고 오랜만에 친구의 집에 가니 친구와 친구의 강아지가 더없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래, 내가 이 소중한 둘(친구의 강아지까지 포함하여)을 두고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힘든 시절도 함께 헤쳐온 우리인데. 이렇게 사소한 걸로 마음이 잠깐 상했었다는 걸 알아도 관계가 틀어지지 않을 친구이지만, 왠지 오늘은 이런 걸로 마음이 상한 내가 조금 부끄러워서 친구를 마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사람은 누구나 이해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 그리고 나 역시 그렇다는 걸 언제나 잊지 말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