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 이야기
이번 여름 수박은 영 맛이 없어. 엄마는 저녁을 먹고 나면 몇 번이나 수박 얘기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올해 여름에 샀던 수박은 너무 과숙됐거나 오래되어서 과육이 영 시원찮았다. 가족들은 여느 때와는 다르게 수박을 별로 먹지 않았고 나와 동생은 주로 꿀을 타서 수박을 갈아먹었다. 형체도 없이 갈린 수박은 그저 달았고 시원했다. 매년 먹었던 알맞게 익은 수박이 그리 먹기 힘든 것이었나. 적당히 익은 채 팔려 우리 집까지 왔던 그 많은 수박들이 문득 소중하게 여겨질 무렵, ‘적당히’라는 부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적당히 사랑하고 적당히 슬퍼하고 또 적당히 행복할 줄을 몰라서 대게는 많은 시간들을 아파한다. 뭐든 중간만 가자는 말도 있듯이 ‘중간’, ‘적당히’, ‘알맞게’ 이런 애매한 단어들은 사람을 유혹하는 힘이 있어서, 양 극단 사이 그 어딘가에서 표류하고 싶어지게만 한다. 나는 적당히 잘 살아왔나. 나는 빨갛게 잘 익은 수박일까, 아니면 갈아먹어야만 하는 수박일까. 생각해 보면 적당히 산다는 것만큼 어려운 일도 없는데 ‘적당히’는 삶의 기본이자 기준처럼 자리 잡아 버렸다.
돌이켜보면 ‘적당히 좀 해’라는 말을 유독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적당히 할 줄 모르는 아이였던 나는 어른이 된 지금도 종종 적당하지 않아서 주위 사람들에게 핀잔을 듣곤 한다. 좋아하는 일에 지나치게 빠져들고, 관심 없는 일엔 일절 관심을 두지 않고. 한 번 결심한 건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나는 잘 돌보지 않는 타입. 글로 쓰고 보니 수박으로 따지자면 과숙된 수박에 가깝지 않나 싶다. 과숙된 수박엔 손이 잘 가지 않던데. 아아 나는 갈아먹어야만 하는 수박이었나 보다.
과숙된 수박은 꿀을 만나 수박주스로 다시 태어난다. 나와 동생은 그렇게 며칠 동안 수박을 잘도 갈아 마셨다. 맛있는 수박은 수박 자체로도 충분하지만 과숙된 수박은 언제든 화채도 될 수 있고 수박 주스도 될 수 있었다. 적당히 잘 익은 수박을 사는 게 제일 좋지만 과숙됐거나 오래된 수박을 샀다고 해서 절망할 필요가 없는 이유다. 마찬가지로 ‘적당’ 하지 못하고 극단으로 편중된 삶을 산다고 해서 굳이 적당해지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되는 이유다. 삶은 존재 자체로도 언제나 가능성을 가진다. 우리는 적당하든 적당하지 않든 언제나 화채도 될 수 있고 수박 주스도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