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세상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단다

난 정말 그래요

by 윤사강

문득 방 안에서는 은은한 향이 났다. 그 향의 출처가 다 시들어버린 꽃인지 증발해버린 디퓨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니면 뚜껑을 닫아 놓은 향초일지도. 이렇게 서술하니 생각보다 방 안에 향의 근원이 많다고 느낀다. 이런 게 나의 취향이었나. 어느덧 서른을 향해가는 나는 여전히 나의 취향이나 취미 따위를 설명하는 데 애를 먹는다. 예컨대 친하지 않은 누군가 현지 씨는 취미가 뭐예요 하고 물을 때. 넷플릭스를 본다고 하면 그저 그런 시시한 사람처럼 여겨질 것 같고 글을 쓴다고 하면 요즘엔 잘 없는 괴짜처럼 여겨질 것 같아 적당한 대답을 고르기가 어렵다. 물론 결국 시시한 사람이 되는 걸 택해버리고는 말지만.


하지만 넷플릭스 보는 게 취미예요 라는 대답은 그저 곤란한 질문에 대처하는 매뉴얼일 뿐이다. 사실 다달이 돈은 내고 있지만 접속은 하지 않은지 거의 일 년이 다 되어간다. 요즘엔 그저 나도 ‘넷플릭스 구독자’라는 남들과의 공통분모가 필요해서 구독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다소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지만 인간은 누구나 바보 같은 짓을 하며 살아가니까. 그리고 그런 사실은 때론 위안이 된다. 난 언제나 콘텐츠를 감상할 수 있는 자유를 구독하고 있는 것이다. 가끔은 이런 정신 승리도 필요하다.


언제나 영화를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하루에 한 편씩 보며 시간을 보내던 때부터 아예 보지 않던 시절까지 늘 그렇게 생각해왔다. 특히 요즘 같은 가을이면 따뜻한 시선을 가진 영화들에 갈증이 난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영화에 젖어든다는 것은 상당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새로운 인물들을 알아갈 의지가 있어야 하며 그들과 함께 두 시간 동안의 희로애락을 기꺼이 함께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내 자신을 돌보기도 힘겨운 나는 늘 그 의지와 각오가 부족해 영화를 재생할 수 없었다.


그런 내가 힘들 때 강박적으로 몰두하던 것은 시집이었다. 시집을 의지로 읽었다. 매달리는 심정으로 페이지를 넘기던 때. 마치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타 죽을 것처럼 제대로 읽히지도 않는 문장들을 눈에 욱여넣던 시절. 그땐 시가 그저 음절들의 무리였다. 왜 나는 우울이 깊어질 때마다 난독이 생기면서도 글에 집착하게 되는 걸까. 어딘가로부터 다 괜찮아질 거라는 위로나 또는 나처럼 지독하게 아픈 누군가가 있다는 동질감을 얻고 싶은 걸까. 무릇 힘이 들 때 위로가 되는 건 힘을 내라는 긍정적인 글귀보다는 죽을 것 같다는 모를 이의 고백이었다.


요즘은 한 달에 한 번씩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 글을 읽어도 더 이상 문장들이 분절되지 않는다.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절박하지 않아도 되니 조금은 살 것도 같다. 하지만 여전히 취미가 뭐예요 라는 질문을 받으면 당황하겠지. 그럴 땐 넷플릭스를 봐요 라는 시시한 대답 대신 작곡을 하고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쓴다고 말하고 싶다. 난 더 이상 영화를 보는 것에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기에. 시집의 페이지를 넘기며 위로를 받지도 않기에. 원한다면 언제든 어디든 갈 수 있다. 그래. 난 세상 어디든 날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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