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우린 자라난다. 때론 절망을 먹고.

by 윤사강

친구의 직장 동료의 남자 친구가(이렇게 말하니 나와는 정말 관련이 하나도 없는 인물임에 틀림없다) 췌장암 중기라는 소식을 들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서른. 이제 겨우 서른 개의 해를 살았을 뿐인데 예후가 좋지 않다는 췌장암이라니.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그가 내 또래라는 이유만으로 너무 안타까웠다. 진단을 받고 무서워서 그저 울고만 있다는 그의 소식에 문득 삶을 버리고 싶던 지난날의 내가 생각났다.


암도, 백혈병도,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 살던 때. 온 세상의 슬픔과 우울이 내게 있는 것 같았다. 습관처럼 우울하던 시절. 어쩌면 우울이 습관일지도 몰랐다.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문득 그런 사람들은 기억력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좋았던 기억을 붙들고 오래도록 곱씹을 수 있도록 말이다.


나는 좋았던 순간들을 유난히 빨리 잊는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이 짧은 생의 행복했던 순간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는데 기억나는 게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게 기억력의 문제인지 아니면 지겹게 살아온 삶의 문제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행복해보지 못했다고 생각하느니 차라리 기억력이 나쁘다고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게 괜찮아지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밤들은 피부에 새겨졌다. 내가 묘사했던 우울은 파도였다. 잔잔하게 넘실거리다가 한 번쯤 방심한 사이에 바지를 젖게 만들고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그런 파도. 밤은 늘 축축했다. 가끔은 베개를 뒤집어야 했다. 그런 밤에 자주 들었던 노래들은 더 이상 듣지 않는다.


어떤 밤은 너무나도 외로워서 누군가가 없으면 타 죽을 것만 같았고 어떤 밤은 차라리 깊숙한 내부로 흡수되어버리고만 싶었다. 결코 나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결국 내가 감당해야만 했던 텅 빈 무게들. 가끔은 밤이 너무 무겁고 짙어 숨을 참아야만 했다. 어떤 날은 누군가에게 하염없이 기대를 걸고 싶었고, 또 어떤 날은 그러한 나를 얄팍한 이성으로 붙들어야 했다. 갖은 방법으로 애써도 달래지지 않는 것도 있었다. 그냥 그런 것도 존재했다.


다들 인생은 모르는 거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내 인생만은 알 것 같았다. 내 미래만은 어떨지 분명히 보였다. 늘 생각했던 것만큼의 삶을 살았다. 생각보다 괜찮은 기회 같은 건 쉽사리 오지 않았다. 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애쓰며 살게 될까. 위 세척을 하고 돌아온 날 아빠의 손을 잡고 인간 존재가 갖는 고독은 질량으로는 달랠 수 없다며 자조하던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 순간엔 다시 살아보겠다고 마음먹었다.


우린 자라난다. 때론 절망을 먹고. 참으로 공평했다. 모두가 밤에는 혼자이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제외하면 세상 가장 공평한 것이 바로 밤의 존재였다. 어두운 하늘이 서서히 밝아지는 새벽을 누군가도 나처럼 지켜보고 있을 것이었다. 아침을 기다리는 일은 아득했지만 이것이 나 혼자만의 형벌이 아님을 알자 조금은 견딜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래, 이젠 기쁨에 대한 글을 적자. 지나간 행복이 까마득하다면 내가 느끼는 찰나들을 적자. 그런 일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행복했던 찰나들을 기억하게는 해주겠지. 이젠 바닐라 라떼 한 잔이 내게 얼마나 소중한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공상하는 순간이 얼마나 짜릿한지를 적어야겠다. 나의 우울이 아닌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나를 소개할 수 있을 때까지. 슬픔과 우울에 예민한 만큼 기쁨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적어야겠다. 우리의 성이 절망 위에 세워진대도 그건 결국 너와 나의 울타리가 되네. 살아있다면 그걸로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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