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아무 일이 없다

한 달 동안의 안부

by 윤사강

아침 약과 취침 전 약은 한 달이 지나자 한 봉지도 남지 않고 정확하게 다 소진되었다. 내가 또 한 달을 성실히 복용해낸 것이다. 오늘은 한 달만에 병원에 가는 날. 내가 다니는 대학병원은 사람이 너무 많아 예약을 하고 가도 늘 오래 기다려야만 한다. 그만큼 정신건강이 피폐한 사람들이 많다는 뜻이겠지. 진료실 앞 의자에 하염없이 앉아있다 보면 시간이 분절된다. 정신건강을 치료하려 왔다가 되려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게 될 때쯤 내 순서가 온다.


진료실의 손잡이는 언제나 삐걱거린다. 듣기 싫은 쇳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요즘 사무실의 손잡이에서도 이런 질감의 소리가 나던데. 하릴없는 생각을 하며 진료실의 의자에 앉는다. 내가 수십 번도 더 앉았던 의자. 수천 명이 앉았을 바로 그 의자. 환자가 많은 오후 4시 반의 교수님은 다소 힘겨워 보인다. 잘 지냈느냐고 한 달만의 안부를 묻는다.


내게는 아무 일이 없다. 비가 억수록 많이 오던 날 누군가는 죽었으며 많은 집들이 잠겼다. 나와 연인은 죽진 않았지만 우리의 발이 되어주던 차를 잃었다. 뉴스에서만 보던 일을 겪고 그래도 목숨을 부지한 게 어디냐며 자위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봐도 불행이 다행처럼 여겨지진 않았다. 올해 장마에 우리는 차를 잃었고 이건 우리에게 두고두고 추모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내게는 아무 일이 없다.


나는 잘 지냈다. 이번 달에는 열리는 엘리베이터 안에 칼을 든 누군가가 있을까 겁을 내지도 않았고 에스컬레이터를 탈 때 굴러 떨어지는 상상을 하지도 않았다. 지난달에 늘린 약이 효과가 있었는지 이번 달엔 늘 나와 함께하던 불안들이 잠잠했다. 안온한 일상이었다. 몇 번의 도전을 했고 또 몇 번의 고배를 마셨다. 매일 글을 썼다. 요즘은 글을 쓰는 일이 삶의 낙이 되어버린 것만 같다. 글감을 찾느라 일상이 해체되었다. 하지만 그런 일상의 해체가 나쁘지만은 않게 느껴졌다.


잘 지냈노라고 소리 내어 말했다. 잘 지냈습니다. 잘 지냈어요. 입 밖으로 내뱉은 나의 목소리가 내 귀로 다시 들어와 뇌리에 박히는 일련의 과정을 감각했다. 그래 나는 한 달 동안 잘 지냈구나. 교수님 앞에 앉아 한 달 동안의 근황을 고하고 나서야 비로소 한 달이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그건 나만이 가지는 월간 의식 같은 거였다. 마치 달력을 한 장 넘길 때 느끼는 그런 감정을 나는 매번 진료실에서 느껴왔다.


경과가 좋아 다음 예약은 한 달 반 뒤로 잡게 되었다. 문득 한 달 반 뒤에도 진료실의 손잡이는 여전히 삐걱거릴지가 궁금했다. 언젠가 문을 열면서 삐걱거리는 손잡이에 내 모습을 대입해 보던 시절도 있었다. 과연 한 달 반 뒤에는 어떤 안부를 묻게 될까. 그때의 나는 내 근황을 어떻게 말하게 될까. 한 달 반 뒤의 내 모습이 기대된다고 말한다면 나는 조금은 나아진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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