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는 선선했고 나는 반팔을 입었다

가을이 왔다

by 윤사강

시련을 긍정하는 만큼 어른이 된다. 어젯밤엔 혼자 숨을 꺽꺽거리며 순간 J를 생각했다. 울음을 터트릴 줄 아는 언니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J와의 약속을 끝내 지키지 못했다. 병동에서조차 소리 내어 울지 못하던 나는 열린 방의 창문을 닫을 생각도 못하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것을 택하는 어른이 되었다.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마찬가지로 받는 것과도 같았다. 나는 혼자가 되었으나 그것은 내가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침은 쌀쌀했다. 그러나 오후는 다시 후덥지근해질 것임을 알았다. 긴팔을 입었다가 과감히 반팔로 갈아입었다. 출근하는 길은 추워서 연신 팔을 감싸 안아야 했다. 내가 선택한 결과였다. 평소라면 그늘을 찾아 걸었을 테지만 오늘은 유독 햇빛을 찾아 걸었다. 햇빛 아래서도 몸은 그다지 따뜻해지지 않았다. 식어버린 것을 다시 데우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슬픈 일이었다. 슬퍼져 버린 모든 것들을 생각하며 걸었다. 작열할 오후의 태양을 위해 오전 출근길을 희생했다.


커피를 마셔도 유난히 피로가 풀리지 않는 날이 있다. 내겐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 어젯밤 울음의 여파로 눈두덩이가 무거웠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고역이었다. 몰두할 일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햇빛이 블라인드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그래 내가 이걸 기다려왔지. 좋은 날씨였다. 뭐든 하나쯤은 거짓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출근길의 추위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오후의 햇빛은 강했다. 에어컨을 틀지 않은 8층의 사무실은 더위로 숨이 막혔다. 작은 탁상용 선풍기 한 대가 나의 체온을 책임지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이란 이렇게나 간사했다. 아침 출근길엔 그냥 긴팔을 입고 나올 걸 그랬나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오후가 되자 더 얇은 반팔을 입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었다. 마음이란 건 원래 이렇게 연약한 걸까.


전쟁 같던 하루를 보내고 지하철을 기다리며 넋을 놓았다. 나를 현실로 데려온 건 사랑하는 이의 메시지였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그 물음에 나는 기어이 얼마나 사랑하느냐고 반문했다. 우습게도 정해진 답을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난 누군가에겐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러자 지옥 같던 하루가 조금 숨이 트이는 듯했다. 퇴근길은 적당히 선선해서 걷기가 딱 좋았다. 톰 미쉬의 노래를 들으면서 걷는 길은 아침의 그 길과는 달랐다. 온도도, 기분도, 음악도. 마음이 편안해지니 별게 다 보였다. 예컨대 앞서 가는 이의 걷는 모양 같은 것들.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문득 가을이 왔음을 실감했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잎사귀들을 찍어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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