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장
자주 가는 가게에서는 늘 같은 것만 주문하는 버릇이 있다. 그 버릇처럼 한 해를 살 때에도 관성처럼 하던 것만 지속하며 근 열두 달을 보냈다. 어느덧 일 년을 겨우 한 장만 남겨둔 지금, 이룬 것은 무엇일까. 또 잃은 것은 무엇일까. 2022년을 정리해보자면 뭐가 남을지 두려웠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까 봐. 내가 살아낸 한 해가 별 것도 아닌 무엇일까 봐. 그게 두려웠다.
하지만 한 해를 반추하는 것은 연말이 되면 우리 모두가 자연스럽게 수행하는 습관 같은 것이었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때가 되면 배가 고파지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마는 일. 그래서 나는 새로운 달의 시작임에도 불구하고 초장부터 허탈함과 씁쓸함을 마구 느끼고 있는 것이다. 시간은 수직으로 낙하하는 물처럼 빠르게 흘러 남은 달력의 한 장 마저 급히 떼어내겠지. 그러면 어쩔 도리가 없이 또 한 살을 먹고 만다.
이렇게 흘러가도 되는 걸까. 이런 남루한 삶을 사랑해도 되는 걸까. 한 번도 12라는 숫자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내게는 늘 후회와 아쉬움, 그리고 왠지 모를 무상함의 상징이었기 때문에. 달의 자리가 12로 바뀌고 나면 카운트다운을 하는 심정으로 서른한 개의 밤을 보냈기 때문에. 어제 들은 라디오에서 디제이는 외로움의 영원함에 대해 이야기하며 외로움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12월은 왠지 모르게 외로운 달이었다.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다. 사람은 혼자 있을 때도, 누군가 곁에 있을 때도 필연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다고. 그 외로움을 잘 견뎌내는 사람이 잘 살아내는 것이라고. 운이 좋아 외롭지 않은 한 해를 보냈지만 그 외의 새로운 도전도, 그 어떤 성취도 없었던 정말 평이한 한 해. 그저 일상을 잘 굴려왔다는 것 하나만으로 내 자신을 안아줘도 되는 걸까.
오늘은 한 달 하고도 보름 만에 정신과에 방문했다. 다음 진료 예약이 내년 1월 말에 잡힌 걸 보고 자연스럽게 시간의 흐름을 감각했다. 한 달 반치 약을 먹다 보면 해가 바뀌어 있겠구나. 한 살을 더 먹었겠지. 또 뭐가 달라져 있을까. 찰나의 순간 마음이 붕 떠올랐다. 하지만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낡고 닳은 일상을 그대로 이어받아 뻔한 일 년이 시작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내 삶을 보듬어야겠지. 삶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던 순간에조차 나는 살아냈으니 그래도 살아가야지. 퇴근길, 하늘 위로 보는 반달이 소중해서 나는 오늘도 하루를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