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 기존의 세입자가 이미 아파트로 이사를 한 상태라서, 셀프 페인팅을 할 시간이 넉넉했다. 한 달 정도의 텀이 있었던 것이다.
기존 세입자였던 아기 엄마가 마지막으로 집 점검을 하고 떠나면서 나에게 말했다.
"열쇠 하나는 위층 주인 어르신들께 맡겨 놓았어요. 그분들께 여기 새로 이사 들어오실 때까지 집 좀 잘 점검해 달라고 말씀드려 놓았어요."
한겨울이라 보일러, 수도 등이 걱정되었던 차에 아기 엄마의 말이 고마웠다. 그 부분은 마음을 내려놓았다. 아직 우리는 입주 전이고, 보일러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으니까. 우리는 그저 틈틈이 들락거리며 청소도 하고 페인트칠도 했다.
헌데 입주를 한 주 앞둔 어느 날, 갑자기 주인집에서 전화가 왔다.
"새댁, 보일러 관리를 어떻게 한 거예요? 지금 보일러 배관이 다 얼었어요. 빨리 와보세요."
"네? 저희 이사 들어가기 전에는 관리를 해주실 거라고 이전 세입자분께 들었는데요."
"아니, 자기들이 열쇠 가지고 왔다 갔다 들락날락했으면 자기들이 알아서 하는 거지!"
안양에서 독산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기사님이 수리를 마친 상태였다.
"34만 원입니다."
'34만 원 이라니...'
가만히 앉아서 그 돈을 다 낼 수도 없고. 심장이 또 두근 거렸지만 억울한 부분, 이야기를 나눠볼 만한 여지가 있기에 용기를 내 주인집으로 올라가서 대화를 청했다.
아기 엄마가 떠날 때 열쇠 하나가 주인집에 있고, 우리가 이사 들어오는 날까지 수도와 보일러 등을 관리해 주실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갔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는 34만 원의 수리비를 다 내는 게 억울하다.
하지만 주인분들도 무척 억울해 보였다. 때로는 단호하게, 때로는 푸념하듯 긴긴 이야기를 하셨다. 계약서 상으로 집을 넘겨받았고, 열쇠를 쥐고 집을 왔다 갔다 했으니 우리 책임이라는 것.
입주도 하기 전에 주인집과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억울해서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돈 좀 아껴보자고 전세 5천만 원짜리를 찾아왔다. 또 더 아껴 본다고 한 겨울에 손수 페인트칠을 하고 이삿짐도 직접 포장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날벼락 같았다. 하지만 이러니저러니 집요하게 따져봤자 뭐 하겠는가. 앞으로 위아래층, 주인과 세입자 관계로 살아야 하는 것을. 결국 양쪽의 억울함을 담아 반반씩 하기로 했다. 17만 원을 드렸다.
한차례 얼굴을 붉힌 집주인이 바로 우리 위층에 딱 붙어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져 버렸다. 하지만 이는 끝이 아닌 시작이요, 원래 골골대는 보일러에 인공호흡기를 잠깐 가져다 대는 데에 34만 원이 들었다는 것을 이때는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