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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십편 Feb 25. 2023

보일러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 보일러 노이로제 > 83년 생의 집



우리가 이사를 들어가기도 전에 얼어버렸던 보일러.



그렇게 집주인과 약간의 언쟁이 끝나고, 절반의 수리비를 계좌 이체하면서부터 '보일러'라는 세 글자가 불길하게 다가왔다. 애써 '이사 전의 빈 집'이기에 발생했던 해프닝으로 생각을 매듭짓고, 한 겨울의 이사를 감행했다.



이사 이틀 전에 눈이 왔다. 하루 새에 눈이 눈 녹듯이 녹아 있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이삿날의 독산동 언덕은 빙판이었다. 약간의 눈에도 마을버스가 외면하는 언덕 꼭대기가 듬성듬성 얼어 있었던 거다. (2012년 시점)


게다가 큰 차 한 대로 왔는데 골목이 너무나 좁아서 들어올 수가 없다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를 들었다. 눈이 와서 견적 낼 때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것.


"몸으로 날라야죠 뭐."


견적도 내고 실무도 하시는 실장님은 사람 좋게 웃으셨지만, 우리는 눈앞이 캄캄했다. 반포장 이사. 몸으로 때우겠다며 도우미 이모님 몫은 내가, 남자 직원 한 명을 줄이는 대신 그 몫은 남편이 돕기로 했는데. 이것은 고난도.


사다리차가 필요 없는 층이라 사다리차를 안 불렀다. 하지만 막상 짐을 나르다 보니 대문의 높은 문턱과 중간에 층계참이 있는 계단을 몇 개를 걸어 오르며 짐을 나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다들 어떻게든 버텨보자는 표정으로 움직이다가 눈이 마주치며 어이가 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입김은 호호 나고, 집은 냉동실 같고, 근육이 뻣뻣한데 몸은 무지 많이 움직여야 하는 역시나 잊히지 않는 이삿날이었다.










한 겨울의 이사는 힘든 것이었다. 한 겨울의 보일러 고장도 그랬다.




이 집의 화장실 창은 밖을 향해 나있었다. 완전히 야외는 아니고 간이 창고가 있긴 했다. 옆집의 짐들이 쌓여 있고 간단한 문이 있었다. 그래도 야외로 난 창만큼이나 추웠다.

 

온수가 아니면 한 겨울의 냉기를 감당할 수가 없는 곳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덜덜 떠느라 어깨가 뭉치는 느낌마저 들었으니까. 그래서 샤워 중 제일 괴로운 순간은 물을 잠시 멈추고 머리에 거품을 낼 때였다. 몸은 젖었는데 물은 잠시 멈춰서 냉기에 포위된 그 순간에 몸이 떨렸다.



그날도 그렇게 물을 잠시 멈춘 순간을 몹시 괴로워하며 빛의 속도로 거품을 내고 있었다. '이만하면 됐어. 이제 그만! 샤워기! 샤워기!'



다급하게 물을 틀자 온수의 따뜻함이 온몸을 감쌌다.


'와, 너무 따뜻해.' 하는 순간 찬물이 쏟아졌다.



"악!"


놀란 손이 수전을 때리듯이 내리쳤다. 눈물이 핑 돌았다.



다 헹구지 못했지만 일단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고, 보일러 컨트롤러를 노려보았다. 갑자기 이 전 세입자인 아기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여기 다 좋아요, 걱정 마세요. 근데... 혹시나 보일러가 고장 나도 당황하지 마세요. 주인 어르신이 바꿔주기로 약속하셨거든요."




그거였다. 보일러가 멈췄다. 이따가 남편도 와서 씻어야 하는데. 찬물 벼락을 맞아 괜히 서러운 마음으로 주인 아주머니네가 살고 있는 위층에 올라갔다. 문을 두드려 보았는데 아무도 없었다. 전화를 드렸다.



"어, 새댁 나 지금..."



집주인 아주머니는 아르바이트 중이다. '나 지금 배달하느라 동네 돌고 있어.'라는 말에 아주머니를 찾아 골목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비슷 비슷하게 생긴 다가구 주택들이 모여 있는 비슷한 골목이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동네 아래쪽까지 내려가니 저 멀리 음료 수레 옆에 서있는 주인아주머니가 보였다. 힘들어 보이셨다.



껄끄러운 얘기 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 성격이라 안절부절못하며 한 걸음씩 내려가는 데,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다른 아주머니가 나보다 먼저 집주인아주머니에게 다가갔다. 두 분이 반가운 인사를 나누는데 주인아주머니가 그 아주머니께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나 좀 살려줘. 우리 집 좀 어따가 팔아줘. 내가 아주 죽겠어. 수리비가 여기저기 보통 들어가는 게 아니야. 걸치 아프고 불안해서 잠을 못잔다니까."


'에휴... 잠 못 자기는 주인이나 세입자나 매한가지구만.'



내가 수레 앞에 도달하자, 주인아주머니는 앞의 분께 하소연하던 그 표정 그대로의 슬픈 눈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그 눈빛에 공감이 되어서 너무나 괴로웠지만, 추운 겨울에 이사하자마자 찬물로 샤워하는 건 다른 이야기였다. 마음이 약해지고 말고 할 게 없었다.



"어르신 제가 물벼락을 맞았어요. 보일러 바꿀 때가 됐다고 전에 아기 엄마한테 들었는데, 바꿔주시면 안 될까요?"


"아이고 추웠겠네. 응, 보일러 바꿔줄 거야."


'아...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꿔줘야지. 그런데 완전히 고장 나면 바꿔줄게. 그거 껐다가 켜면 다시 될 거야."



"네... 가서 해볼게요."




껐다가 켜면 보일러는 다시 작동했다. 하지만 도대체 어떤 메커니즘으로 얼마간 버티는 것인지 짐작할 수도 없이 불규칙하게 꺼져버렸다. 그 불확실성에 두 발을 뻗고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가장 싫었던 건 내 피부가 수온의 급격한 변화를 알아채는 순간의 실망, 절망감. 인생의 서러움이 몰려오려고 했다.



주인아주머니가 결심한 듯 꺼낸 말이 "새 보일러"가 아니라 "수리기사님을 불러 줄게." 였을 때, 이사를 잘 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리 기사님은 보일러를 살려 냈고, 오래가지 못했고 나는 보일러에게 모진 말을 내뱉었다.



"제발 죽어! 차라리."



 

주인아주머니와 굉장히 친한 사이이신 듯한 기사님이었지만, 어쨌든 공짜 수리는 아니었다. 또다시 기사님이 방문해 견적을 말했을 때, 나는 애틋하고 간절한 눈빛으로 아주머니를 바라보았고 아주머니는 결심이 선 듯 듣고 싶었던 그 한 마디를 하셨다.




"그럼 고치지 말고 그냥 새 걸로 바꿔줘."




팡파레가 울렸다! 남편에게 당장 전화하고 싶었다!


안도감과 갑작스러운 친근함에 아주머니 어깨를 콩콩 두드리고 싶을 만큼 기뻤다. 이제 이 집의 유일한 불안 요소가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보일러 문제가 '새 보일러' 하나로 다 해결된다고 생각한 건 오판이었다. 집의 바닥에 '낡고 낡은 배관'이라는 게 구불구불하게 깔려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배움의 길은 끝이 없기에 이날로부터 머지않아 나는 이 집의 시멘트 바닥을 뜯자 모습을 드러낸 그 배관이란 것과 마주하게 된다.



그 사실을 몰랐던 이 날은 그저 기쁜 마음으로 남편에게 승전보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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