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그대로인데 그 남자만 없다.
신경은 쓰이지만 모르는 사람보다 못한 사이
지연과 승빈이 CC였다는 것을 잘 안던 동기들은 모두 3학년이 되었기 때문에 그나마 지연은 승빈을 보지 않아도 됐기에 다행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각자 학년 강의실 나가 복도를 걸을 때나 학교 식당 등을 갈 때 가끔 예고 없이 마주쳐야 하는 게 문제였다. 지연이 승빈의 예의 없는 이별통보에 배신감을 느껴 막말을 한 뒤 두 사람은 서로 마주치지 않게 했다. 지연은 쉬는 시간에는 불필요하게 강의실에서 나가지 않았다. 승빈은 늘 그랬듯 밤을 새우고 수업을 듣고 바로 집으로 가서 잠을 자는 낮과 밤이 뒤 바뀐 생활을 했다.
2학년에 2학기에 복학한 지연은 군대에 갔다 와서 복학하는 사람들과 친해지게 됐다. 보통 여학생들은 휴학을 잘하지 않지만 남자들은 군대에 갔다 와야 하니 복학을 많이 했다. 서로 복학한 사이라는 게 공통 주제였을까 지연의 뒤 학번인 후배들과는 섞이는 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지연의 과에는 여학생 보다 남학생이 많았기에 더욱 그랬다. 오전 전공과목이 끝나고 혁이가 지연이의 강의실로 들어왔다. 잠깐 이야기를 하자는 신호를 보내서 둘은 과사무실 옆 베란다로 나갔다. 혁이는 승빈과 지연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같은 학번 동기이다. 망설이다가 혁이가 지연에게 물어보았다.
" 너 승빈이 형이랑 무슨 일 있는 거야? "
"..... "
" 승빈이 형이랑 너 이제 다시 안 만나? "
"어" 지연은 짧고 간단하게 대답만 했다. 그래서였는지 혁이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인사를 하고 지연의 강의실에서 나갔다.
지연은 기분이 꿀꿀했다.
' 학기는 시작했고, 적응도 얼추 해가고 있는데... 혁이는 왜 저런 걸 물어보지? 보면 모르나?'
지연은 다음 교양수업에 들어갈 기분이 아니어서 학교를 빠져나왔다.
222번 버스를 타고 지연이 무작정 간 곳은 사람이 많은 대학로였다. 지연의 발걸음은 승빈과 갔던 햄버거 가게와 카페에 눈길이 갔다. 지연은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고 마로니에 공원을 걸었다. 기타를 들고 매주 공연을 나오는 유명한 아저씨의 공연을 보러 갔다. 돈을 내야 하는 공연도 아니고 길거리에서 즉흥적으로 하는 공연이었기에 벌써 인파들이 많이 모여있었다. 한 동안 대학로의 유명 스타 아저씨가 재미있는 멘트를 시작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지연은 본능적으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 랄프로렌 향수의 주인공이라 생각했던 승빈은 온 데 간데없고 모르는 사람들만 삼삼오오 공연을 구경하고 있었다. 랄프로렌 그 흔한 향기 때문에 그날만 해도 지연은 몇 번이고 주변을 둘러봐야 했다.
지연은 가까이 사는 수희에게 전화를 해서 점심을 먹었다. 분식을 먹기로 한 지연과 수희는 분식집으로 향했다. 쫄면과 돈가스를 한 개씩 시켜서 나누어 먹기로 했던 지연과 수희는 음식이 나오자 먹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연은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쫄면 위에 고명으로 있는 계란 반쪽 때문이었다. 그렇다. 승빈이 제일 좋아하는 식재료는 계란이었다. 삶은 계란을 보니 승빈이네 집에서 지연이 떡볶이에 삶은 계란을 먹으려고 계란을 삶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기억 속에는 승빈은 삶아진 계란을 들고 지연에게 말했다.
" 내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이 계란을 한 번에 쉽게 까는 방법인데...? "
" 뭔데? 어떻게 하는 건데? "
"자. 봐봐..."
승빈은 계란의 한쪽 끝을 조금 깐 후에 자신의 입을 갔다 대고 아주 세게 불었다. 뭔가 제대로 안된다는 듯이 당황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꼭 해보이 기겠다는 집념으로 계속 입에 한가득 공기를 물두꺼비처럼 계란에 난 구멍에 입김을 불어넣었다. 결국 승빈의 얼굴만 빨개지고 계란은 까지기는커녕 승빈이 하도 만져서 속까지 으스러졌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지연을 웃음을 터뜨렸다.
" 진짜 그렇게 하는 거 맞아? 그렇게 계란을 깬 사람이 있어? "
" 아... 그렇다니까. 내가 저번에 TV에서 봤는데... 승빈은 멋쩍은 듯 자신의 타액이 묻은 계란을 수돗물에 씻었다.
" 그 계란 딱 기억해. 오빠가 먹어야 돼. 너무 더러워서 못 먹겠어. " 아직도 지연의 귓가에 선명하게 삶은 계란 까는 거 하나로 까르르 웃던 기억이 떠올랐다. 결국 대분분의 음식을 남기고 다시 거리로 나왔다. 다시 버스를 타고 학교 자취방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는 문이 보이는 바로 앞자리에 앉은 지연의 머릿속에는 승빈이 지연이 생일에 버스에서 내리면서 지연에게 넘겨주듯 선물했던 장면들도 떠올랐다. 지연은 괴로운 듯 한숨을 쉬고 머리를 버스 창에 기대어 앉았다. 몇 정거장쯤 갔을까 또 익숙한 향기가 지연의 공기를 감쌌다. 지연은 다시는 속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이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승빈을 찾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 가방에 달려 있던 열쇠고리를 만지작 거리며 딴생각을 하려고 집중했다. 그러나 랄프로렌의 향기를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익숙한 신발을 보았다. 그리고 승빈이 즐겨 입던 청바지를 보았다. 지연은 고개를 들어 누군지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모른 척하고 몇 정거장을 더 가니 익숙한 차림의 사람이 내렸다. 내린 사람의 뒷모습만 보아도 그 사람은 승빈이었다. 지연의 마음은 또다시 두 방망이 질을 시작했다. 하지만 진정을 하고 지연은 자신에게 주물을 걸 듯 맘속으로 속삭였다.
' 승빈이는 이제 없어. 있어도 내게 투명인간인 거야... '
학교 앞 버스 정류장도 대학로도 모두 그 풍경 그대로인데 승빈이 있는 풍경만 없었다.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던 지연은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났다. 엄마 잃어버린 아이처럼 다 큰 성인이 엉엉 울면서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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