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온다
자연스러운 스킨십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승빈은 졸업전시회 준비에 한창이다. 3학년이 된 지연도 바쁘게 지냈다. 내년이면 졸업을 하기에 미리 매달 토익 시험을 치고 진로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들이 많아졌다. 4학년들은 면접도 보러 다녀야 하기에 일찍 졸업 전시회를 하고 학교에 나오는 날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지연은 2년 동안 승빈과 종종 마주쳤지만 투명인간인 것처럼 대하곤 했다. 근데 이제 4학년들이 학교를 나오지 않으니 진짜 서로를 우연히라도 마주칠 일은 없었다. 지얀은 홀가분하면서도 가슴이 한편에는 큰 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먼저 고백하고, 헤어지기 싫어서 울고 불고 했던 지연의 첫사랑은 그렇게 지연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3학년이 된 지연은 조작업이 많아지고 실기 과제가 많아서 밤을 새우는 일이 많았다. 서로 바쁘고 피곤하다 보니 사실 서로 성별을 따질 여유들이 없었다. 밤샘 작업을 하고 대충 화장실에 세수를 하고 수업을 듣는 날들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모두 한 가족처럼 지냈다. 컴퓨터로 그래픽 작업들의 해야 하는 일도 잦았서 아예 집에 있는 컴퓨터를 학교로 가져와서 작업을 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바빠도 컴퓨터 게임을 하고 수다를 떠는 시간은 밤 샘작업의 일부이다. 남학생들은 3D 그래픽이 훌륭했던 리니지 게임에 푹 빠져있었다. 지연은 그런 것에 관심이 있진 않았지만 모두 함께 하는 분위기였기에 캐릭터 하나를 만들었다. 게임을 잘 모르는 지연에게는 게임에 접속해서 게임 속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게임도 해야 했고 실기 과제도 바빴던 탓일까 한 밤에 대 여섯 명쯤 남아서 과제를 하고 있을 때 지연은 코피를 쏟았다. 지연의 생애에 처음 나는 코피였다. 당황한 지연은 허둥지둥 티슈를 찾았고 3학년 과대표가 자신의 휴지를 주었다. 머리를 뒤로 힘껏 젖히고 지혈을 하는 모습을 보고 과대표인 동현이 다가왔다. 고개를 뒤로 저친 지연의 목과 머리를 살며시 세우며 동현은 말했다.
" 코피 날대 뒤로 목을 쳐지면 안 좋은 피가 목 뒤로 넘어간데... 그래서 그냥 너무 숙이지도 뒤로 저치지도 말라더라고... " 지연은 처음 나는 코피도 당황스러웠지만 동현의 손길이 조금 부담스러웠다. 어색했던 시간이 흐르자 지연은 집에 가기로 하고 아침 일찍 조형관 건물에 문이 열리자마자 집으로 가려고 나왔다. 터덜터덜 후문 쪽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어디선가 낯선 오토바이 한 대가 섰다. 헬맷을 벗고 동현이 지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 너 어디 살아? "
"저 자취해서 집 가까워요. "
" 태워다 줄게. 타 "
" 아.. 괜찮아요. "
동현은 지연에게 자기 헬맷을 씌워주고 지연의 뒷자리에 태웠다. 속도 나는 것을 무서워해서 운전면허도 못 딴 지연에게 오토바이를 탄다는 것은 생각도 해본일 이 아니었다. 지연은 얼떨결에 뒤에 타고 동현의 허리를 꽉 잡았다. 지연의 집 앞에 금방 도착했는데 지연은 얼마나 무서웠던지 정신이 혼미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동현은 지연이 쓰고 있던 헬멧을 벗겨 주면서 자연스레 헝클어진 지연의 머리를 만져주었다. 지연은 또다시 동현의 자연스러운 스킨십에 조금 놀랐지만 티 내지 않고 집으로 올라왔다.
또다시 사랑?
지연의 자취하는 곳은 옥탑방이다. 삼층을 지나 옥상에 다 다르면 조그만 새시 문이 보인다. 샷시 문을 열고 나가면 지연의 자취방이 있다. 옥탑이라 평상도 있고 식물도 기를 수 있는 공간도 있어서 지연은 그 집이 맘에 들었다. 물론 여름엔 찔 듯이 덥고 겨울에는 춥게 목욕을 해야 했지만 장점도 많은 집이었다. 그날부터 지연은 자꾸 동현이 아른거렸다.
' 미쳤어. 아냐 아냐. 그냥 코피가 났고 아프니까 도와준 거지...'
실제로 동현은 과대표이기도 했고 추친력과 친화력이 좋아서 학교에서 인기가 많았다. 남자 여자를 떠나 모두가 믿고 따르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렜기에 지연은 동현의 호의가 그의 습관과 품성에서 배어 나오는 자연스러운 것이라 생각했지만 왠지 동현에게 마음이 조금씩 이끌리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없었다. 하지만 첫사랑처럼 남자에게 먼저 고백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동현의 마음이 어떤지 알 수없기에 섣불리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지연은 한 번은 캠퍼스 커플을 해본 경험으로 다시는 캠퍼스 커플을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겨울 방학이 다가오고 과제전을 위해 학교에서는 너도 나도 모여서 실기실을 청소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연도 다른 학생들도 모두 실기실 커튼도 떼고 유리창까지 닦았다. 과제전시를 하기 위해 책상들도 다시 배치를 했고 과제전시에 쓸 베너 출력도 외부 인쇄 업체에 맡겼다. 동현은 과대표로서 인쇄소에 나가서 지켜봐야 했고 지연은 자신의 베너에 오타가 발견되어 같이 충무로에 있는 인쇄소로 나가는 일이 생겼다.
" 오늘 베너가 모두 출력이 된다고 하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면 기다렸다가 같이 학교 들어갈래? " 동현이 먼저 제안을 했다. 베너의 오타가 잘 고쳐져서 인쇄가 잘 됐는지 엄자치 확인을 하고 가려던 참이었던 지연도 동현의 생각에 흔쾌히 동의를 했다. 그런데 그때 문제가 발생했다. 인쇄소에서 우리 학교에서 고른 천이 다 소진되어서 몇 시간 후에나 다시 천을 도매 집에서 받아야 인쇄를 시작할 수 있다고 했다. 동현과 지연은 하는 수 없이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둘은 화로에 삼겹살을 구워주는 곳에 가서 식사를 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출신 학교나 살았던 지역을 말하게 됐는데 동현은 강원도 강릉에서 학교를 다녔고 지연도 강원도 춘천에서 학교를 다닌 공통점이 생겼다. 늘 그렇듯 공감대가 생기면 더 가까워지는 법이다. 둘은 그렇게 밤늦게나 인쇄물을 찾아서 학교로 돌아왔다. 인쇄가 늦어지는 바람에 설치 팀은 밤샘 작업을 해야 했고 동현과 지연은 설치팀을 도와서 과제전 준비를 했다.
같이 우여곡절을 겪었던 탓이었을까? 둘은 친해졌고 어느새 둘도 모르는 사이에 캠퍼스 커플이 되어있었다. 지연은 캠퍼스 커플만큼은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또다시 CC의 탄생이었다. 그렇게 그 둘은 졸업반을 맞이했고 서로 취업 준비를 하느라 바빴다. 데이트라고 해봤자 자신이 면접을 본 회사 분위기를 말하면서 밥을 먹거나 포트폴리오에 대해 조언을 해주는 정도였다.
학점 관리를 잘했던 지연은 그 해 그녀가 가고 싶어 했던 대기업에 합격 소식을 먼저 받았다. 동현은 여러 군데 면접을 봤지만 뚜렷한 결과는 없었다. 대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게 된 지연은 연수니 뭐니 해서 바쁘게 지냈다. 그러는 사이에 동현과의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더 줄어들었다. 지연과 동현의 바쁜 삶 속에 적응하느라 서로에게 소원해졌고 그렇게 둘은 자연스럽게 헤어지게 됐다.
< 다음 편에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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