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작가 삼락

작가 일락 3

첫 술에 배부르랴

by 바람

물속에서 진화하던 식물은 5억 년 전 바다를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1억 4천만 년 후. 아파트 7층 높이의 나무가 나타났다. 상상할 수 없이 긴 시간을 가늠하기 위해 칼 세이건(에덴의 용, 사이언스북스)의 도움을 받아 보자. 칼이 우주 나이 150억 년을 1년으로 환산해 그린 우주력에 따르면, 45억 살인 지구는 9월 14일 생이다. 식물은 12월 20일 육지로 거처를 옮기고, 나무는 23일, 꽃은 28일 출현했다. 인간은 한해의 마지막 날 밤 10시 30분에야 등장한다.


나무가 생기고 5일이 지나 꽃을 가진 식물이 땅에 돋았다. 여기서 1일은 약 4,100만 년에 해당하니 나무가 꽃을 피우는데 2억 년 이상 걸렸다. 늦은 개화는 당연해 보인다. 우주도 아름다운 꽃을 맞이하기 위해 길고 긴 시간을 기다렸다. 하지만 인간보다 무려 3일이나 먼저 세상의 일원이 된 꽃이여, 어서 모습을 드러내 다오.


작은 생명체 앞에서 지루함을 달래려 우주력을 들먹인다. 어린 왕자가 만난 여우의 말도 떠올렸다. “너의 장미를 소중하게 만든 건 네가 장미를 위해 들인 시간 때문이야.” 이렇게 일락이는 내게 단 하나뿐인 라일락이 되어간다. 기다릴수록 시간은 더디게 흐르고 이제껏 무심히 지나친 수많은 꽃들에게 미안해진다.


일락이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꽃대는 줄기나 잎보다 환한 연두이고 여러 개의 작은 츄파춥스(막대사탕)가 달린 듯하다. 사탕 부분이 점차 하얗게 밝아지며 길어졌다. 끝이 네 갈래 나팔 모양으로 열린다. 드디어 꽃이 얼굴을 보였다.

보랏빛이 너무 연해서 흰색에 가까운 꽃은 작고 볼품없었다. 포도송이처럼 우수수 달린 꽃 사이로 “라일락 꽃향기 맡으면~~~ 잊을 수 없는 기억에~~~~”(이문세의 노래)가 현기증 나게 들릴 줄 알았다. 향기를 안주삼아 소주 한잔 하고 싶었는데 며칠 만에 몽땅 시들고 말았다.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 이었다(최영미, 선운사에서). 식물에겐 꽃을 피우고 종자를 남기는 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 배웠다. 잎을 펼쳐 양분을 모으는 이유이기도 하다. 벌과 나비가 올 수 없는 도시의 환경을 탓해야 할까. 꽃은 성과 없이 흙빛으로 쪼그라들었다.


심란한 마음을 달래기도 전에 아침에 본 일락이는 시들시들했다. 새로 뻗은 줄기가 축 쳐져있다. 어제까진 멀쩡했는데 밤새 무슨 일이 있었는고. 어쩔 줄 몰라 허둥대다 일단 물부터 주었다. 전조가 있었을 텐데 알아채지 못했다. 베란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상태를 살폈다.


일락이가 배송될 때 동봉된 관리법엔 수분과다로 식물이 죽는 경우가 많다 했다. 물을 많이 주면 흙 속 공기층 형성이 어려워 뿌리가 숨을 쉬지 못해 썩게 된다고 한다. 걱정쟁이인 나는 수분이 많을까 봐 자제하며 물을 주고 있었다. 잎이 시든 걸 보면 분명 물이 부족했다. 햇살이 너무 강한 탓도 있을까 싶어 화분을 방 안으로 옮겼다.


타는 애간장을 누그러뜨리며 책을 읽다 간간이 고개를 들었다. 그때마다 일락이는 조금씩 생기를 되찾았다. 오후가 되자 단단하고 싱싱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사실 일락이는 그동안 열심히 살고 있었다. 나무 회초리처럼 민둥한 줄기는 굵어졌다. 새 줄기를 뻗었고 잎을 냈다. 작지만 꽃도 보여주었다.


겨우 첫해인 걸. 나는 기대만 하고 돌보기는 소홀했구나. 내년엔 더 많은 꽃을 보여주고 향기도 짙어질 텐데, 너무 성급했다.

일락이의 개화에 대한 실망은 작가의 삶을 시작한 스스로에 대한 마음이 투사된 것일지 모른다. 생각을 글로 전달하는 건 어렵고, 쓰려했던 소설은 시작도 못했다. 하루에 쓸 수 있는 양은 매우 적고 기본기 없는 글쓰기가 불안했다. 과연 잘할 수 있을까.


이런! 바보같이.


성과위주의 삶을 끝내겠다고 시작한 글쓰기에, 이전과 같은 근심을 얹다니!


처음으로 라일락을 키우건만 이제는 일락이가 더위를 좋아하지 않고, 꽃필 무렵 특히 목말라하며, 꽃이 진 후 잎이 급격히 커진다는 것을 안다. 그사이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썼으니 글쓰기의 기본기는 점차 다져질 테다. 법학 외의 지식은 전무하나 고시 생활로 단련된 끈기는 작가 생활에 도움이 될 것이다. 일락이가 자라듯 나는 자랄 수밖에 없다. 생물의 진화에 비하면 티끌보다 작은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우리는 꿈을 품은 집필실에서 서로의 호흡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양분을 채워가고 있다. 근심은 접어두자.


지금 이대로 가슴 벅찬 하루인 것을…….

참고> 21세기에 들어와 우주 나이는 138억 년으로 측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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