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도를 측정하면 나무가 돌보다 따뜻할 것만 같다. 식물도 동물처럼 물질대사 과정에서 온기를 뿜어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겨울 산길에서 만져본 나무는 돌보다 차가웠다. 돌이 의외로 나무만큼 차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나무에서는 아무런 온기도 느낄 수 없었다. 거칠고 딱딱한 무생물 같았다. 그렇다면 잎을 모두 거둬들인 나무는 어디에서 생명의 흔적을 찾아야 할까.
일락이도 그랬다. 일주일째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봐도, 오두방정 떨며 챙기는 아침인사에도 반응이 없다. 생명이 끊어진 듯 고요했다. 물을 주었을 때 줄기 가까운 흙부터 건조해지는 현상이 그나마 희망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설핏한 연둣빛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느껴졌다. 뛸 듯이 기뻤으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었다. 지나친 바람으로 일어난 환시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루 더 지켜보기로 했다.
다음날. 연둣빛이 선명해졌다. 일락이가 깨어난 게 분명하다. 나는 즉시 남편에게 ‘생존이 확인됐소’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살았구나! 살아있어!
마침내 죽었나 살았나 하던 걱정이 끝났다. 일락이는 나의 지나친 관심과 시선, 수다에 부담을 느껴 “나 참, 신경 쓰여 잠을 못 자겠네. 살아있는 거 맞거든. 이제 됐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수수수숙, 소리가 보이는 마냥 순식간에 길어졌다. 리본으로 땋아 만든 끈 공예 볼펜의 매듭 모양으로 쭉쭉 뻗었다.
나는 평소 남편에게 보내는 카톡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남달리 다정한 부부라서가 아니다. 면허 취득 이십 년차지만 운전이 늘지 않았다. 벽이나 간판에 내차가 긁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서툰 운전 실력에 집필실에 도착하면 무사하다는 알림을 하는 형편이다.
대개 행복한 하루를 시작하라거나 불금을 기대하라는 몹시도 평범한 내용을 돌려가며 반복하는데, 이제 도착 알림 서비스의 내용이 바뀌었다. ‘일락이는 햇살 받으며 잘 있어요. 잎이 나왔어요. 꽃 봉오리로 추정되는 것을 찾았어요. 이제 나무 꼴이 되어가요. 일락이는 오늘도 일취월장! 곧 꽃이 필 것 같아요’로 메시지가 채워지고 그날의 사진이 이모티콘을 대신했다.
신나서 일락이의 안부를 주고받다가 더 잘 키우고 싶은 욕심에 라일락에 대한 검색을 시작했다. 라일락은 식물계, 피자식물문, 목련강, 현삼목, 물푸레나무과, 수수꽃다리속으로 분류된단다. 생물시간에 달달 외웠던 종‧속‧과‧목‧강‧문‧계(거꾸로 외웠던가?)를 기억해내며 학명도 확인했다. ‘Syringa vulgaris L.’(국립생물자원관 참조)
라일락의 유사종으로는 개회나무, 수수꽃다리, 정향나무 등이 있는데 라일락과 생김새가 비슷하여 혼용되어 쓰이기도 한다. 영어로 syringa를 검색하면 개회나무로 해석되고 lilac이 부기되어있다. 블로그에서 라일락 관련 그리스 신화를 읽었다. 출처를 확인하고 싶었으나 나무 관련 서적이 없는 관계로 이윤기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열었다.
신화는 헤르메스가 아르고스에게 자기가 불고 있던 피리의 유래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요약하자면 ‘시링크스라는 사랑스러운 요정이 있었는데 그녀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며 사냥을 다녔다. 사냥터에서 돌아오던 날 들판의 신인 판을 만나게 되었고 판은 그녀를 유혹하려고 끈질기게 노력했다. 이를 무시하고 도망치던 시링크스가 강둑 근처에서 따라 잡히게 되자 친구 요정들이 갈대로 변신시켜주었다.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갈대로 변신하다니, 라는 판의 탄식이 갈대 줄기 안에서 아름다운 소리로 공명했다. 소리에 도취한 판은 갈대 줄기를 꺾어서 피리를 만들었다’라는 이야기다.
이 피리를 팬플루트, 시링크스라 칭한다. 현대 그리스어로 시링가로도 부른다니 라일락의 학명 시링가와 무관할 수 없어 보였다. 하지만 조사능력의 한계로 정확한 정보를 파악하지 못했다. 이런 상태로 글을 써도 되나 고민했다. 하지만 신화란 모름지기 전승되는 설화인 것을. 분명한 게 뭐가 있으랴. ‘판’만 보더라도 아비는 헤르메스이나 엄마는 칼리스토, 페넬로페 혹은 암염소로 설이 분분하다. 이렇게 죄책감을 무마시킨다. 끝내 라일락과 시링크스의 관계를 확인하지 못했다. 그러나 밤하늘의 별처럼 쏟아지는 잎의 축제에 더해지는 피리 소리는 상상만으로 좋았다. 때맞춰 필 꽃을 기다리며 라일락처럼 향기로울 요정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