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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Apr 19. 2024

시인들의 술자리

 봄 학기 개강일이었다. 수업을 마치고 개강식 겸 찻집에 모였다. 각종 차와 커피, 커다란 빵까지 주문했다. 크림 한가득 입에 묻히면서 열심히 먹었는데도 빵이 남았다. 그때 숙녀 1이 말했다.    

  

 “이런, 빵 남기면 안 돼요. 선생님이 사신 건데… 나눠서 다 먹고 갑시다.”     


 우리의 주전부리를 선생님이 사셨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허걱! 이 건 좀~~

     

 수강료도 얼마 안 되는 마당에 커피까지 사시면… 출강이 아니라 재능기부?     


 민망해 쭈뼛거리고 있는데 숙녀 5가 호기롭게 말했다.      


 “선생님. 제가 막걸리를 한번 대접하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선생님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때는 눈치채지 못했다. 선생님이 그렇게 술을 좋아하실 줄은.     


 이제껏 술자리라곤 한 번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하나둘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더니 일정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이날은 숙녀 3이 안되고 그날은 숙녀 4가 어렵고… 날짜를 조율하다 모두 참석할 수 있는 한 달 후로 약속을 잡았다.    

  

 시간이 흘러 대망의 약속 날이 되자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늘은 늦게 들어올 거니까 먼저 저녁 먹고 당신도 술 한잔하고 있어요"하고 일러뒀다.      


 그렇게 만전을 기하고 수업에 갔는데 웬걸, 숙녀 5가 오지 않았다.      


 ‘깜빡하셨나? 바쁜 일이 있어 못 오시는가?’     


 강의가 시작되고 한 시간이 지나도록 빈 책상을 바라보며 그녀를 기다렸다. 혹여 술자리가 파투 날까 염려도 했다.      


 수업을 마칠 즈음 조심스레 강의실 문이 열렸다.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뒤꿈치를 든 숙녀 5가 상체를 숙인 채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바쁜 일이 있었지만 약속 때문에 늦게라도 참가한 것이었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그녀가 말했다.

 “기억하시죠? 오늘 제가 막걸리 쏘기로 했던 거. 어디로 가면 좋을까요?”     

 숙녀 5의 한마디로 강의실이 들썩였다.


 “그 집 있잖아요. 예전에 갔던 곳.”

 “길 건너 거긴 어때요?”

 “아니 가까이 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의견이 분분했다.      


 학습센터 정문을 나설 때까지 장소를 정하지 못했다. 지시대명사가 난무하는 와중에 숙녀 1이 “저기로 갑시다”했다. 단호한 음성에 모두가 동의했다.      


 거기든 저기든 어딘지 알지 못하는 나는 어리둥절 시인들을 뒤따랐다.

     

 그들이 향한 곳은 정문에서 채 5분도 안 되는 거리의 국숫집이었다.    

 

 “여기 칼국수가 정말 맛있어요.”

 식당 문을 열면서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평소에도 다정하신 분인데 더 다정한 음성이었다.     

 

 식당은 열 평 남짓 자그마한 실내에 테이블 넷이 놓여있었다. 숙녀 1이 옆자리에 앉아 2년 전까진 매주 왔던 곳인데 주인장이 아파서 한동안 가게 문을 닫았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여기에 모인 분들은 모두? 술꾼??


 의혹은 알코올이 들어가면서 점차 사실로 드러났다. 처음엔 술을 잘 못 마시니 한 병만 시켜 나눠 먹자고 했다. 하지만 일단 술이 들어가자 한 병이 두 병 되고 두 병이 세 병 됐다. 이후는 세지 않았다.  

    

 그리고 다들 알딸딸해져 이전보다 더 자상자상 다정다정 다양한 이야기를 나눴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술에 취해도 대화의 주제는 여전히 ‘시’라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쓸까. 이런 내용으로 시를 한 번 써봐라. 젊을 때 등단하면 활동의 폭이 더 넓다. 대충 이런 주제로 일관했다.  

    

 살짝 주제에서 벗어나는 이야기가 ‘어떤 꽃을 키우는데~~’라든가 ‘에세이는 좀~~’ 정도였다.    

  

 대게 잘 모르는 사람들이 모일 때 자주 벌어지는 호구조사는 없었다. 나이, 학벌, 직업, 자녀의 수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난 업무 모드의 가면 없이 쑥스러움쟁이, 내 모습 그대로 술자리를 즐겼다.  

    

 그러다 숙녀 5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일에 쫓겨 시 쓸 엄두가 안 나요. 이러다 영영 시를 못 쓸 것 같아요.”


 하소연이 이어졌지만 아무도 걱정을 안 했다. 술을 좋아하면 일단 시인의 자격은 충분하다고. 이런 사람이 한번 쓰기 시작하면 거침없다며 격려했다. 그리고 앞에 있던 술잔을 들어 다 같이 원샷!!     


 갈지자로 걸어 집에 돌아온 나는 오랜만에 황동규 님(오래전 ‘즐거운 편지’로 우리를 사로잡았던 그분이 맞습니다)의 시전집Ⅱ 열었다. 혹시 이 분도 술을 좋아하실까?     

 

 첫 장을 넘겼다.     


 “혼자 몰래 마신 고량주 냄새를 조금 몰아내려/ 거실 창을 여니 바로 봄밤.”으로 시작하는 ‘봄 밤’이 바로 나왔고 다음 장엔 “사람 피해 사람 속에서 혼자 서울에 남아/ 호프에 나가 젊은이들 속에 박혀 생맥주나 축내고”로 시작하는 ‘몰운대행’이 있었다.   

   

 몇 장 더 넘기면 “오미자 한줌에 보해소주 30도를 빈 델몬트 병에 붓고/ 익기를 기다린다”로 시작하는 ‘오미자술’. 여기서 두 장을 넘기면 또… 그다음 장을 넘겨도 또…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18화에서 화자와 시인을 명확히 구분해야 한다, 시 속에는 시인이 없다고 배웠지만, 글쎄…….     


 그리하여 나는 혼술하고 있던 남편 옆에 앉아 한잔 아니 서너 잔을 더 마셨다. 콘 위스키에 대한 찬사를 시로 지은 랭스턴 휴즈를 생각하며, 불금은 헤이 헤이!!       


   



물에는 헤이 하고 말하고,

맥주에는 헤이 헤이 하고 말하지,

물에는 헤이,

맥주에는 헤이 헤이,

하지만 좋은 콘 위스키를 마시면

헤이 헤이 헤이 하며 건배하지! <그렉 클라크·몬티 보챔프 지음, 알코올과 작가들, 을유문화사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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