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기 위해

by 바람

일을 중단하는 것은 몹시 부담스러웠다. 경악한 주변의 반응이 아니더라도 옳은 결정일까, 스스로 여러 번 되물었다.


실력을 쌓고 의뢰인의 신망을 얻기까지 갖은 노력을 기울였는데 폐업이 웬 말인가. 이제 겨우 할 만하다 싶은 시기였다.

하지만 업무를 계속하면서 우울씨와 이별할 자신이 없었다. 소송업무를 하는 동안은 긴장 상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송사에 휘말린 사람들은 대개 심각한 불안을 호소했고 나는 그들의 고통을 달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그 불안을 껴안아 왔다.


불안은 전염성이 지독했고 당시 나의 의식 수준으로는 일과 일상생활의 공존이 어려웠다.

잘해야 한다는 강박이 쉴 새 없이 압박해 왔기에 마음이 회복될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줄곧 이어져 온 다리의 통증으로 몸과 마음이 모두 지친 상태였다.


깊은 고민 끝에 사무실을 정리하기로 했다. 새로운 사건을 더 이상 받지 않았고 진행 중인 사건만 처리했다. 종결이 많이 남은 사건은 의뢰인의 동의를 받아 사임했다.


여하튼 나는 그렇게 사건을 모두 수습하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사무실에서 짐을 빼던 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몇 년간 내게 가장 소중했던 곳, 누군가를 위해 법리를 검토하고 변론을 준비하던 나의 꿈과 희망을 고스란히 담았던 장소였다.

그런 곳을 떠난다는 사실이 실감 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을 닫는 순간 가슴이 텅 비어버리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일을 그만두면 모든 것이 해결될 줄 알았다. 그러나 우울씨는 여전히 내 곁을 맴돌았다.


수면 부족은 과수면으로 바뀌었고 나를 추동하던 책임감을 놓아버리자 극도의 무기력에 빠져들었다.


모든 것을 갈아 넣은 소송업무를 끝내자 나는 마치 세상에 없는 존재처럼 여겨졌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때부터 실존에 대한 진지한 의문을 품었던 것 같다.


기존의 가치관에 갇혀있던 나는 외적 상황의 변화에도 그리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로스쿨 때처럼 다시 신생아가 되어 잠만 자는 상태에 놓였다. 눈을 뜨면 훅하고 불안감이 엄습해 왔기에 잠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이불 밖은 위험해’ 자세를 장기간 고수했다. 곁에서 지켜보던 남편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갔음은 두말할 나위 없었다.


그러나 남편은 미안해하는 나에게 “이 상황에서 제일 힘든 사람은 당신이야”라고 말해주었다. 병이 들 때까지의 시간만큼 쉬고 나면 절로 나을 테니 조급해하지 말라며 되려 위로했다.

출근할 때도 퇴근할 때도 누워있는 아내에게 단 한마디 싫은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런 남편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세상을 등졌을 테니 이런 글을 쓸 기회는 없었을 것이다.


정성껏 나를 보살펴준 남편과 과수면을 함께 해준 털복숭이 친구들(반려묘)로 인해 나는 점차 회복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