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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Sep 05. 2023

백수의 삶

 일도 안 하는데 굳이 필요할까 싶어 완전히 약을 끊었다. 원체 약을 싫어했기에 일단 자력갱생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리 잘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약을 끊고 규칙적인 월경주기로 돌아오기까지 반년이 걸렸다. 그즈음 하여 온몸이 건조하다는 느낌도 가라앉았다.      


 약을 먹는 동안 갈증으로 자주 물을 마셨고 욕조에 몸을 구겨 넣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습관도 사라졌다.   

   

 다만 지나치게 잠을 많이 잤다. 누가 더 잘 수 있나 내기하듯 잠을 잤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자도 고양이를 이길 순 없었다.      


 자다가 눈을 떠보면 뽀리뽀(첫째 냥)는 머리맡에 소냐(둘째 냥)는 발치에서 자고 있었다. 솜사탕같이 보들보들한 털에 손가락을 뻗으면 골골골 규칙적인 진동이 전해 왔다.      


 둘은 쓸데없는 걱정으로 눈앞을 흐리지 않는 자족한 존재였다. 나는 그들의 느긋함과 변함없는 애정, 따끈한 체온에 위로받았다.      


 그렇게 잠만 자는 삶에도 어김없이 배는 고프고 요의를 느꼈다.      


 몸을 일으키는 건 대체로 요의 때문이었다. 생리적 욕구를 해결하고 손을 씻다가 화장실 거울에 비친 한 여자를 마주하면 화들짝 놀란다. 우울씨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낯선 모습이다.      


 정신 차려야지, 하며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지개색 밥상보가 식탁 위에 얹혀 있었다. 밥상보를 벗기자 숨어있던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아침에 새로 한 밥과 반찬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결혼 후 나의 요리 실력에 놀라 자구책으로 요리를 담당해 온 남편이, 내가 아프고부터 더욱 신경을 썼다. 영양가 있고 맛난 음식을 먹이려고 무진장 노력했다.      


 귀찮을법한데 매번 새 반찬을 해줬고 색깔과 모양도 예쁘게 꾸몄다. 당근을 별 모양으로 썬다든지 하트 모양 동그랑땡을 만들거나 꽃 모양 전을 구웠다.      


 고맙고 미안해서 꺼이꺼이 소리 내어 울어버렸다.      


 눈물을 따라 우울씨가 흘러내리면 잠시 감정의 소강상태를 맞이하고 감사한 마음에 남김없이 먹는다. 그러고 나서 힘을 내 옷을 갈아입고는 밖을 나갔다.      


 집 근처에 한적하고 작은 공원이 있어 나들이 장소로 안성맞춤이다. 여러모로 나는 참 복이 많은 사람이다.    

  

 가로수에 볕이 걸려있는 동안 나는 공원 가장자리를 따라 만들어진 트랙을 돌았다. 어디선가 본 ‘일조량이 많은 곳으로 이사만 해도 우울증이 낫는다’는 문구에 홀려 태양 아래 나를 무방비로 노출했다.      


 선크림을 바르지 않고 모자도 쓰지 않은 채 몸과 마음의 균을 박멸한다는 기분으로 걸었다. 효과는 알쏭달쏭한데 기미는 많이도 생겼다.      


 걷는 동안에는 라디오나 팟캐스트를 들었다. 두 시 탈출 컬투쇼는 웃음을, 일묵스님 강의는 지혜를, 지대넓얕은 지식을 선물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헤드셋을 끼고 몇 시간씩 공원을 서성댔다. 느릿느릿 절뚝이며 걸었다. 주민들이 보기에 참으로 이상했겠지만,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다.    

  

 나는 살아야 했고 낫기 위해 공원에서 세월을 보냈다.      


 부담스럽게 왕성한 녹음과 질식할 것 같은 매미 소리를 지나, 바닥에 떨어진 노란 은행잎을 밟다가, 하얀 입김을 불어가며 서리에 반짝이는 언 땅을 딛고, 뽀얀 목련이 파란 하늘을 선명하게 밝힐 때까지 계속해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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