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의 초점이 온통 외부로 향했던 시절에는 자신에 대한 오해가 많았다. 그 부작용으로 고통받던 나는 방향을 바꿔 ‘자신’을 관찰하기로 했다.
전전긍긍하며 외부의 변화를 추구하던 방식을 멈추고 자기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살펴보았다. 이젠 관념적으로만 자신을 인식하던 태도를 사양한다.
이 즈음하여 감정 일기도 썼다. 오늘 주로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감정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적어봤다.
기록을 시작하자 마음속 변화를 상세히 인지할 수 있었다. 하루 새에도 들쭉날쭉 다채로운 감정을 경험했다.
의외로 감정은 기복이 심했고 내가 옳다고 믿는 가치관과 어긋나는 상황이 벌어질 때 주로 머리와 가슴이 어수선했다. 소란스러움과 함께 부정적 감정도 일어났다.
여기서 나는 놀라운 점을 발견한다. 자연스레 일어난 불편한 감정을 내가 다시 비난하고 있었던 것이다.
감정이 올라오는 순간 바로 프로크루스테스(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잘라내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춰 늘여서 죽인다는 그리스 신화 속 인물)의 침대가 출현했다.
내가 힘든 것은 부정적 감정이 생겨서가 아니었고 그 감정을 대하는 방식 때문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난하는 내적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상적인 기준에 부응하라고 자신을 닦달하면서 아프게 했다.
잠시만 방심하면 침대가 나타나 평가하고 단죄하는 가혹한 마음의 패턴이 반복되었다.
침대는 이상적인 가치를 구현한다기보단 처음부터 단죄를 목적으로 한 자의적인 도구였다.
과거의 고통을 거듭하지 않기 위해 그놈의 침대를 없애야 했다.
따라서 나는 자신과의 관계를 새로이 설정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에게 친절하고 온전한 이해를 선사하기 위해 노력했다.
자기 사랑도 정성이 필요했다.
자기 사랑이 익숙해질수록 침대의 형태가 흐려져 갔다.
부수적으로 자신에 대한 (여태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한)정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관계의 한계는 어디까지인지를 파악했다. 이런 정보는 내가 가진 허상을 깨부수는데 아주 효율적인 기회를 제공했다.
신기한 일은 자신을 알기 시작하면서 타인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내게 찾아오는 감정을 재단하지 않으면 남의 감정도 재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지. 그런가 보지’ 이런 식으로 타인의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게 되고 불편함도 그냥 묵묵히 보고 있을 수 있는 힘이 생겼다(물론 늘 그런 것은 아니다).
‘넌 왜 그래? 날 납득시켜 줘’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내 감정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가끔은 이렇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더 큰 이점도 있었으니, 그것은 감정이 삶을 꾸려나가는 건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작년엔 분노를 에너지원으로 단편소설을 썼고 올해는 불안을 에너지원으로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이런 감정이 없었다면 나는 더 망설였을 것이다. 변화가 무서워 제자리에 주저앉아 버렸을 것이다.
이렇게 나는 성장해가고 있다. 내 감정을 미워하지 않고 자신에게 가장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로 결심한다. 여러 번 다짐해도 과거의 패턴은 또다시 반복될 것이다. 습성을 바꾸는 건 원래 어렵다.
그래도 괜찮다.
스위치백 열차처럼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게 인생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