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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r 08. 2023

너는 너만의 이야기가 되렴

기예르모 델 토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

꿈 이야기로 시작하는 글이 식상한 건 알지만… 이 글은 이렇게 시작하고 싶어서 그냥 쓰려고 한다. 낮에 꾼 꿈에서 나는 한 아이를 안고 있었다. 왜 그 아이를 안고 있었는지 맥락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 아이가 책 표지로 만들어진 종이 인형이었다는 이미지는 선명하다. 꿈에서 나는 인형을 정말 아이라고 여기며 조심스레 달래주었다. 꿈에서 깼을 때 그 사실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면에서는 전혀 이상하지 않은 일이라고도 느꼈다. 우리는 이야기가 허구라는 사실을 기본적으로 전제하며 그 안에 빠져들고, 꿈은 일종의 이야기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나는 싸구려 공룡 피규어를 양손에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만들어 내곤 했다. 그때의 나처럼 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보면, 가짜를 진짜인 셈 치며 이야기에 빠져드는 건 인간의 본성에 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우리는 손에 든 인형이 가짜라는 것쯤 당연히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이야기가 자라나는 순간, '그것들'은 순식간에 '그들'이 된다.





피노키오의 투박한 디자인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피노키오>(이하 <피노키오>)에서 가장 인상 깊은 건 피노키오 디자인이다. 동화 피노키오를 원작으로 하는 무수한 영화들과 이 영화의 차이점이기도 한데,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는 하나도 사람 같지 않다. 다른 영화들의 피노키오 인형은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애니메이션이든 실사 영화든) 나름의 리얼리티가 있다. 이목구비의 위치, 신체의 균형과 모양 등에서 그들은 인간과 유사해 보인다. 그들은 인간처럼 옷을 입고, 인간처럼 자연스럽게 걷는다. 작년 <피노키오>와 비슷한 시기에 공개된 디즈니의 피노키오 실사 영화에서 제페토(톰 행크스)는 그가 만든 피노키오를 두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진짜 거의 사람 같아!" 결정적으로 그들은 진짜로 인간 소년이 되는 결말을 맞는다.


하지만 <피노키오>의 피노키오는 그렇지 않다. 물론 이목구비를 비롯한 인간의 신체 부위를 어느 정도 가지고 있으나, 이 목각인형의 팔, 다리, 목은 지나치게 얇고 그에 반해 손과 얼굴은 지나치게 크다. 제페토가 만취한 상태로 피노키오를 만들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오른팔과 왼팔의 길이도 확연히 차이가 나며 귀의 모양도 오른쪽과 왼쪽이 다르다. 몸통에는 못이 덕지덕지 박혀있고 머리에는 나무의 나이테 자국이 드러나 있다. 피노키오는 영화 내내 당장 넘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걸음걸이로 비틀비틀 걸어 다닌다. 심지어 이 인형은 옷을 입지도 않는다. 피노키오의 나무 결과 삐걱거리는 관절은 관객에게 그대로 노출된다. 다시 말해 영화는 피노키오가 목각인형이라는 사실을 전혀 숨기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이 영화의 대전제라고도 느껴진다. 피노키오는 결국 '가짜'임을 드러내는 것. 이곳에는 어떤 '매끈함'도 존재하지 않는다(이것은 원작 애니메이션을 실사화하며 우리를 현혹하는 디즈니의 전략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이 영화가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이라는 사실은 그 전제에 부합하는 듯 보인다. 내가 보고 있는 인물과 배경이 대부분 손으로 빚어졌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관객은 인지하며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피노키오>는 존재 자체가 일종의 피노키오다. 제페토가 만든 피노키오가 생명을 얻은 것처럼 제작진들이 만든 인형들은 영화가 되어 살아 숨 쉰다. 영화라는 거짓에게 숨결을 불어넣은 것이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가장 큰 거짓말은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내에서 인형들은 진실의 반대편에서 거짓만을 말하는 파시즘의 시대에 종속된 존재들이다. 이는 피노키오 원작이 인기 있는 동화가 되며 처한 상황과도 일맥상통한다. 1880년대 초 '콜로디'라는 필명으로 이탈리아 어린이 잡지에 연재된 이야기 '피노키오'는, 이후 무솔리니 정권이 집권하며 파시즘의 색채로 재해석되었다. 그때 피노키오 이야기는 극 중 볼페 백작의 인형들처럼 꼭두각시 신세로 전락하며 모험담으로서의 정체성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델 토로는 극의 시대적 배경을 1920년대 이탈리아로 설정하고 무솔리니 캐릭터를 등장시키며 파시즘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돈을 밝히는 볼페 백작을 안타고니스트로 그리며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대항하기도 한다. 이런 배경 아래서, 피노키오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되어야 했다. <피노키오>에서 피노키오가 자기 자신을 발견해 가는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그릇된 가치관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고 이용당해 왔던 역사 속 피노키오들을 대신하여 자기 존재를 바로 잡는 이야기가 된다.


이때 픽션의 속성을 입은 '거짓말'이라는 주요 소재는 이야기 전반을 내외부로 아우른다. 영화에서 피노키오는 우선 카를로가 되어 아버지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감 아래 짓눌려 있다. 피노키오는 아버지를 위해 볼페 백작에게 제 발로 찾아가 꼭두각시 역할을 자처한다. 전쟁은 나쁜 것이라는 아버지의 가르침에도, 너희 아빠가 겁쟁이라 그렇다는 친구의 말에 반발하며 군사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하지만 피노키오에게 이 모든 행동은 거짓말이다. "거짓말은 기다란 코 같아서 거짓말을 한 사람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들에게 보이거든"이라던 제페토의 말처럼, 피노키오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아프게 알아챈다. 자기 자신을 잃는 것만큼 돌이킬 수 없는 거짓말은 없다.


어쩌면 영화 속 피노키오가 원작을 포함한 다른 버전들과는 다르게 인간 소년이 되지 못하는 건 당연한 결말인지도 모른다. 앞서 쓴 것처럼 피노키오가 '가짜'임을 내내 밝히던 영화는, 영화가 삶이 될 수 없듯 거짓이 진실이 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거짓은 거짓으로 남아야 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피노키오가 이미 그에게 주어져 있던 이야기 -인간 소년이 되는 것- 을 벗어나 피노키오가 '되겠다' 말할 때, 거짓은 가장 진실된 거짓이 된다. 여기서 피노키오는 '피노키오로 남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피노키오가 되겠다(I will be Pinocchio)'라고 말한다. 이것은 새롭게 주어진 생명과 함께 '이야기를 입겠다' 말하는 선언에 가깝다. 삶도 아니고 죽음도 아닌 이야기가, 피노키오가 된 피노키오의 코는 더 이상 자라지 않았을 것이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초월하여

그렇다면 <피노키오>는 누구의 이야기일까. 세바스티안 J. 크리켓이 쓴 책 속의 이야기일까? 크리켓은 이야기꾼을 자처한 자다. 그는 영화를 열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피노키오를 만들 당시 마스터 제페토는 이미 한 아들을 잃은 아버지였다.
내 시대보다 한참 전 일이지만 난 그 이야기를 알게 됐고,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


이 내레이션을 보면, 이것은 제페토의 이야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된 크리켓의 이야기인 것만 같다. 하지만 꼭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제페토의 이야기 같기도, 피노키오의 이야기 같기도 하다. '이야기를 알게 됐고, 그것은 나의 이야기가 되었다'는 크리켓의 말은, 전해지는 순간 언제나 주인이 바뀌는 이야기의 속성을 짚어내는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피노키오>는 관객인 우리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크리켓은 이야기꾼이자 자신의 소원을 통해 피노키오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 자이기도 하다. 피노키오는 이야기를 육화한 크리켓 덕에 피노키오가 되었다. 크리켓의 마지막 내레이션은 신비롭다. "어느 겨울날 아침 피노키오는 창가에서 날 발견했다. 난 움직이지 않았다. 피노키오는 날 성냥갑에 넣어 계속 지니고 다닌다. 그 아이의 심장 속에." 크리켓은 마치 자신의 죽음마저 이야기가 된 듯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간다. 그리고 가장 마지막 장면, 죽음을 잇는 사신들 곁에서 천연덕스레 이야기를 푸는 크리켓이 보인다. 꼭 지금까지의 모든 이야기가 죽음으로부터 건져 올린 이야기라는 듯. 죽음을 받아들인 피노키오가 다시 생명을 얻은 것처럼. 피노키오는 죽지 않고 세상으로 나아갔다. 허구이자 거짓인 이야기가, 세상으로 나와 우리에게 전해졌다.


마지막으로 영화 초반 제페토의 말이 기억난다. 지금 만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달라 보채는 카를로에게 제페토는 이렇게 말한다. "기다리면 알게 될 거다. 좋은 걸 얻으려면 인내할 줄도 알아야 돼." <피노키오>를 영화로 만들며 무엇을 말하려고 했나요, 라는 물음에 기예르모 델 토로가 영화를 시작하며 제페토의 입을 빌려 대답하고 있었던 것만 같다. 인내심을 가지고 영화를 보세요. 좋은 걸 얻게 될 거예요. 꼭 영화를 보던 시간이 '2시간짜리의 모래시계', 다시 말해 허구인 이야기가 진짜가 되어 우리 마음에 부활하기까지, 그렇게 크리켓처럼 이것이 우리 각자의 이야기가 되기까지 기다리는 시간으로 느껴진다. 이야기는 이야기를 초월하여, 다시 겸허하게 이야기가 된다. 침대맡에서 영화가 우리에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린다. 너는 너만의 이야기가 되렴. 너도 모르게 자라고 자라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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