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해 쓰고 싶은 새벽이다. 여전히 사랑은 어렵고 무섭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서 막연해지는 마음을 붙잡는다. 어제는 꿈에서 누군가를 칼로 찔렀다. 꿈 안에서는 등을 파고들던 칼의 진동이 선명하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이미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멀어진 감각이다. 그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떠오르는 장면. <본즈 앤 올>에서 매런이 리를 먹기 시작한다. 이 영화에 관해 무언가를 써보려던 시도가 계속 실패하던 건, 바로 그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장면을 써야 하는데 뭘 적든 거짓 같았다. 꿈을 잡아보려는 것처럼.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기리는 합동분향소에서 매일 밤마다 자식의 사진을 들고 가는 어머니가 있다고 했다. 밤새 그 추운 곳에 사진을 두는 게 마음이 아프셨다 했다. 얼마 전 본 단편영화 <한해살이 풀>에서는 엄마의 유골함을 땅에서 파내는 아이가 나왔다. 엄마가 밤새 땅에서 추울까 걱정이 된다던 그의 말이 이해가 갔다. 그런 마음들 앞에서 <본즈 앤 올>의 마지막을 다시 한번 떠올린다. 매런(테일러 러셀)은 리(티모시 샬라메)를 먹고 안심했을까. 그의 몸을 다른 곳에 보내지 않아도 괜찮았을 테니까.
내가 너의 무덤이 되는 일. 내 안에 묻히겠다 비는 너를 기꺼이 삼키는 일. 그리하여 내 몸 안에서 언젠가 너와의 이별이 울창해지는 일. 매런이 리의 몸을 뜯어먹기 시작한다. 그 순간 사랑은 각성한다.
<본즈 앤 올>에 관해 꼭 이야기해야 하는 두 가지 시점이 있다. 우선 리가 매런에게 나를 먹어달라 간청하던 때다. 리는 매런에게 내가 죽은 뒤에 나를 먹어달라 말하지 않는다. 부탁의 시점은 지금,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다. 그건 폐가 찔려 죽어가고 있는 모습 그대로 너에게 먹히겠다는 말, 다시 말해 칼이 아니라 너에게 죽겠다는 말이다. 매런이 리를 먹기 시작하자 리는 끔찍한 고통에 울부짖는다. 매런은 리의 생 자체를 먹어치운다. 목숨을 직접 끝장내며 그의 죽음마저 먹는다. 이터가 경험할 수 있는 다른 차원의 본성을 설명하던 표현 '본즈 앤 올'이, 생과 사를 '통째로' 품어버리는 사랑의 신화에 대한 비유로 다시 적힌다.
다음은 해당 씬이 끝나는 시점이다. 영화는 리가 죽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매런이 리를 먹는 슬로우 모션이 등장한 뒤 장면은 곧바로 끝이 난다. 바로 이 종료의 시점 때문에 둘의 사랑은 그곳에 살아있는 채로 남는다. 이어지는 영화의 정말 마지막 장면. 매런과 리가 마치 한 몸이 된 것처럼 프레임 한가운데에 있다. 카메라는 둘을 멀리서부터 천천히 클로즈업한다. 사랑은 더 이상 삶의 배경으로 남지 않는다. 사랑 자체가 하나의 풍경이 된다. 각성한 채 부동이 된다. 이 마무리를 통해 루카 구아다니노는 사랑이 썩을 수 있는 가능성에 일말의 여지도 두지 않는다. 부패하기 전에 차라리 전부 먹어치우는 것이 그가 그려내는 사랑의 시나리오다. 매런과 리의 사랑은 각성하여 불멸성을 얻는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내게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가 없다. 스크린 속에 박제된 불멸성은 영화 밖으로 나오며 불가능성이 된다.
무엇보다 이 사랑이 각성할 수 있었던 건 매런이 발을 두고 있던 현실의 무게 때문이다. 매런은 공간과 인간이 만들어내는 삶의 생김새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다. 그는 새로운 집에 들어갈 때마다 집안 구석구석을 유심히 본다. 손으로 쓸어보기도, 그곳에 살던 사람의 사진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래선지 그는 설리(마크 라이언스)가 처음 집에 데려갔을 때도 그곳이 그의 집이 아니라는 사실을 예민하게 알아챈다. 매런은 언제나 자기가 살아야 할 인생의 구체적인 예시를 찾아 헤맨다. 갑작스레 발현된 식인 습성이 자기 삶 전부를 뿌리째 뽑아 뒤흔들어 버렸다는 걸 매런은 도무지 믿지 못한다. 그는 말한다. "이 상태로 60~70년을 살아야 한다고?" 그의 손은 오랜 시간을 지나왔을 과거의 흔적을 쓰다듬고, 눈은 이러한 흔적을 새기며 살아갈 미래의 형태를 향한다. 매런은 당연히 엄마를 찾아 그가 잘 살고 있다는 걸 확인해야 했다. 매런에게 엄마는 미래다. 또한 그 길 위에서 들었던, 아버지가 녹음해 둔 카세트테이프 속 목소리는 매런에게 '이터'로서의 정체성을 지연시켜 주는 진통제이자 안정제였을 것이다.
사랑의 세계에는 괴물이 없어야 해
그러나 매런의 엄마는 이렇게 말하며 그를 가차 없이 죽이러 달려든다. 매런은 그가 갈망하던 것과 정확히 반대의 상황을 맞는다. '보통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존재를 부정당한 매런은 더 이상 나아갈 길을 찾지 못한다. 고요히 잠든 리를 남겨둔 채 매런은 도로를 가로질러 그를 훌쩍 떠난다. 이곳에는 이제 길이 없다는 듯.
리와 매런의 첫 만남을 돌이켜 본다. 인디애나의 한 식료품점 앞에서, 매런이 리가 방금 먹어치운 남자의 차에 올라탄다. 운전석에 앉은 리에게 매런은 몇 가지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이때 카메라는 리를 두 사람 사이의 가상선 뒤에서 잡아낸다. 둘은 일반적인 숏과 역숏의 관계로 소통하지 못한다. 리가 매런의 세상과는 다른 규칙을 체화한 사람이라는 걸 영화는 뒤틀린 카메라의 위치로 지시한다. 켄터키를 함께 떠나 처음으로 낯선 이터들에게서 '본즈 앤 올'의 단계를 듣게 되었을 때, 리는 질색하는 매런 옆에서 흥미로운 듯 눈동자를 굴린다. 곧 리와 매런은 언젠가 본즈 앤 올을 사이에 두고 비극을 맞을 수밖에 없는 이들.
매런은 리를 떠난 뒤 설리를 만난다. 그 만남에서 더 큰 절망을 느꼈을 매런은, 아버지가 남긴 카세트테이프를 망가뜨린다. 그것은 "사랑의 세계에는 괴물이 없어야" 한다던 엄마의 신념에 대항하여 '차라리 괴물이 되어 사랑을 하겠다'는 선언에 가깝다. 과거를 만지던 손과 미래를 향하던 눈 아래에서 비로소 현재에 머무는 발. 매런과 리가 재회한다. 자막으로 제시되던 도시명이 AUGUST로 대체된다. 이동으로만 존재하던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한 공간에서 시간의 흐름을 보낸다.
두 사람의 평안한 일상은 착시다. 식인 본능이 깨어나는 순간 곧바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아슬한 경계. 그러나 현재에 손때를 묻혀야 과거를 쌓아갈 수 있다는 일상의 비밀을 두 사람은 깨달았을 것이다. 보통의 하루하루를 흉내 내는 중 그들도 모르게 구축되어 가던 마음의 작업실. 매런이 리를 먹을 때 영화가 비춰주던 집안 곳곳의 사물들은, 매런이 그토록 바라왔던 삶의 모양처럼 보였다.
그리하여 다시 마지막. 괴물이 되어 사랑하기를 택한 두 사람이 키스한다. 식인과 키스가 뒤섞인다. 나는 무엇보다 매런이 리의 입술을 뜯어먹는 모습을 상상할 때 가장 마음이 아프다. 조금은 알고 있다. 흐르고 썩는 몸을 가진 우리가 이런 사랑을 갈망한다면 반드시 불행해질 거라는 걸. 그러나 불행한 이들이 저마다의 불완전한 형태로 서로의 입술을 먹어댈 거라는 것도. <본즈 앤 올>이 말해주는 한 가지 뭉클하고 현실적인 이야기. 키스란, 너에게 먹혀도 좋아, 너를 먹고 싶어, 열렬히 보내는 신호였다는 것. 아마도 우리의 사랑은 입술과 입술이 빈 공간을 없애는 순간을 본뜬 모양이라는 것. 사랑의 신화가 인간에게 남긴 작은 흔적이라는 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