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퇴사를 앞둔 사전편집부의 편집자 아라키(코바야시 카오루)에게 감수자 마츠모토(카토 고)는 그 없이는 사전을 만들 수 없다 말한다. 이에 아라키는 퇴직 전까지 자신을 대신할 사람을 구해오겠다는 약속을 한다. 방법은 '오른쪽'을 어떻게든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을 찾는 것. 곧 언어학을 전공한 영업부 직원, 이름부터 마지메(일본어로 '성실'을 뜻한다)인 마지메(마츠다 류헤이)가 그의 눈에 들어온다. 마지메는 오른쪽을 설명해보라는 아라키의 질문 앞에서 고민한다. 오른손을 허공에서 빙빙 돌리며 구체적으로 오른쪽을 상상하던 그는 곧 '서쪽을 바라보고 섰을 때 북쪽에 해당하는 쪽'이라는 정확한 답을 낸다.
그때까지 영화를 보던 나는 '오른쪽'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사전에 실려도 이상하지 않을 마지메의 정석적인 대답을 듣고, '오른쪽'을 설명하는 데에 필요한 다른 단어들, 이를 테면 '서쪽'과 '북쪽' 등을 떠올리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오른쪽을 오른쪽으로만, 그러니까 다른 단어들 사이의 관계가 아닌 자립한 단어로 떠올렸기에 답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다. 마지메는 단어를 관계로 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당연하게도 그는 아라키의 후임으로 사전편집부에 들어간다. 그리고 '대도해'라는 사전의 집필 프로젝트에 참여한다.
영화를 보며 자주 쓰는 국어사전을 옆에 두고 이런저런 단어를 찾아보았다. 하나의 단어를 설명하기 위해 적게는 두 세 단어, 많게는 수십 개의 단어가 필요했다. 곧 그 어떤 단어도 혼자 있지 않았다. 각각의 단어가 다른 단어들로 이어지고, 그 단어들이 또다시 다른 단어들로 연결되는 동안 사전은 거대하고 움직이는 그물망으로 존재했다. 그 자체로 엮음을 수행 중인 책이 사전이었다. 영화 속 대도해는 그러한 그물을 통해 단어를 낚는 이들을 위한 사전이 될 터였다.
영화 중간, 다시 한번 '오른쪽'을 어떤 풀이로 대도해에 실어야 할지를 고민하는 편집부 회의 장면이 나온다. 마시메가 초반에 했던 대답은 다른 사전에 실려있는 풀이와 비슷했기에 대도해만의 쉽고 독창적인 풀이를 고심하던 것이다. (마츠모토 씨는 '10을 썼을 때 0이 있는 쪽'이라는 명쾌한 풀이를 제시한다.) 그런데 '오른쪽'의 풀이가 사전마다 다르다는 단순한 사실은 어떤 단어에게도 유일한 풀이란 없다는 걸 함의하고 있었다. 결국 단어의 본질이란 만질 수 없는 안개 안에 있다는 것. 그러나, 그렇기에 모든 풀이란 그 단어를 묘사하기 위한 어떤 '최선'이 될 수 있다. 사전은 은유를 허용하지 않는 직설의 모음 같지만, 실제로 사전은, 또 우리가 내뱉는 모든 말은 은유의 집합인 것이다. '언어로 언어를 설명하기'라는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사전을 만드는 이들은 끈질기게 배열과 해설이라는 성실한 몸짓과 말짓을 통해 바다를 축조해 온 것만 같다. <행복한 사전>은 은유가 불러오는 필연적인 무력감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용기를 내야 하는지를 차근차근 설명하는 영화다. 멈춰있지 않고 내내 흔들리던 카메라의 움직임이 그랬다. 사랑이라는 거대한 단어를 구구절절 묘사하기를 겁내지 않는 마지메의 태도 역시 하나의 용례다. (이 영화를 번역을 통해 보는 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
부엌에서 칼을 갈던 카구야(미야자키 아오이) 대신 마지메가 카구야에게 온 전화를 받는다. 곧 카구야가 전화를 넘겨받는다. 아마 도쿄로 올라온 카구야에게 고향에서 만나던 남자가 건 전화였던 것 같다. 다시 부엌으로 돌아온 카구야를 마지메는 어쩔 줄 몰라하며 바라본다. 이때 카메라는 카구야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지메의 뒷모습을 헨드헬드로 찍는다. '뒷모습을 바라보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풀이를 가진 어떤 단어를 본뜨기 위해 영화가 그 나란한 뒷모습의 풍경을 찍은 것만 같았다. 사전은 낱말이 우선하고,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노력의 결실을 통해 만들어질 테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의 경험이란 설명할 수 없는 '마음, 또는 일'이 우선하고, 그에 알맞은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사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렇기에 사전은 본질적으로 아이러니고, 언어는 기본적으로 우물쭈물이다. 영화가 종종 보여주던 클로즈업의 얼굴들을, 우리는 어떤 단어로 설명해야 하나. 마지메의 과묵한 성격은 꼭 타인의 얼굴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영화는 정직한 '행위'를 통해 사전에 음각을 새기려 한다. 우리말 사전에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이는 감정을 표현하는 단어는 '마음'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지시한다. 아이러니마저 포괄하기 위한 사전의 노력이 바로 '일'이라는 단어다. 감정이 반드시 행위로 나타날 때 그것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일인 것이다. 이 영화의 일부를 '사전을 만드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이라 풀이한다면, 여기서 '일'에 방점이 찍힌 장면들이 있다. (또한 그런 점에서 카구야를 통해 '요리를 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을 조금 더 자세히 풀어내지 못한 것이 이 영화의 아쉬움 중 하나다.) 그것은 영화만이 할 수 있는 자세한 풀이 방법이다. 일과 마음이, 행위와 언어가 서로를 한계 짓고 다시 감싸 안는, 겹동그라미의 연쇄 과정을 통해 사전은 만들어진다. 그것은 한없이 빈약한 우리가 어떻게든 함께일 수 있는 방법이기도 하다. 사랑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 이러한 풀이에 정확한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로가 서로의 용례가 되어 주는 일이다. 그렇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뚫려있는 언어의 빈칸을, 관계를 통해 간신히 지탱할 때라야 사랑의 바다 위를 표류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