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니 모레티,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Habemus Papam)>
※ 스포일러가 있어요
하베무스 파팜.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 시대의 선언으로 들릴 운명을 타고난 문장. 우리 안에는 신이 있다, 그 말의 대리로서 선포되는 말. 영화의 시작은 콘클라베다. 붉은 의복을 입고 붉은 주케토를 쓴 추기경들 사이에서 멜빌의 이름이 반복적으로 호명된다. 멜빌, 멜빌, 멜빌… 그 음성은 어디서 들려오는 것일까.
교황이 되고 싶지 않은 멜빌은 고뇌한다. "교회법에 따른 선거로 선출된 교황직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멜빌은 개미 기어가는 소리로 억지로 대답을 뱉는다. 그리고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의 발코니 앞에서 결국 도망친다. 하지만 그가 교황직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는 동안, 그 지연의 시간은 역설적으로 그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만 같다. 모든 결론은 하나로 향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은 그 자리에 어울리는 것입니다. 자리를 가장 탐내지 않는 자가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콘클라베의 역설. 왜 그게 그렇게 되는 거요. 멜빌은 따져 묻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누구에게? 추기경들에게? 성도들에게? 아니면 신에게?
이 영화는 신의 곁에 있는 영화인가, 인간의 옆에 서는 영화인가. 아이러니한 것은 신을 입어야 하는 존재로서 교황이 가장 외로운 인간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멜빌이 사라진 동안 시간을 벌기 위해 추기경단 대변인은 한 바티칸 경비병을 교황의 방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는 그에게 하루에 몇 번 커튼을 움직여 교황이 이곳에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 달라 부탁한다. 추기경들은 수시로 경비병을 통해 교황이 저곳에 있음을 확인하며 안심한다. 커튼의 흔들림과 그곳에 비치던 그림자는 신의 제스처와 얼마나 닮아있을까. 어쩌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은 아닌가. 하베무스 파팜. 하베무스 파팜.
하지만 교황은 결국 발코니 앞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에겐 신이 있다'를 '우리에겐 교황이 있다'로 번역하는 존재가 되기 위해. 제스처가 아닌 화신이 되기 위해. <밀양>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영화의 마지막 햇살을 보며 이창동 감독이 유신론자인지 무신론자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느꼈다. 교황이 되지 못한 멜빌에게도 그 햇살이 내릴까.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은 말한다. "신이 있다면 그건 너에게 있는 것도, 나에게 있는 것도 아니라 우리 사이에 있을 거야." 신에게 있는 것도, 인간에게 있는 것도 아니라 그 사이에 있는 교황. 그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까.
멜빌은 신을 배반한다. 신이 예비한 자리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질문하고 싶어진다. 멜빌의 결정은 신의 불충분함을 증명하는 걸까?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은 성급하고 단순한 결론이다. 교황은 신의 대리자로서 추앙받지만, 실은 신의 종을 대신하는 존재다. 멜빌은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유의지에 따라 결정을 내렸다. 그 결정을 존중하는 것은 아마도 신의 자비와 맞닿은 일일 것이다. 어긋난 삶의 박자와 박자 사이, 성장과 성장 사이. 외롭고 막연하고, 그러나 따뜻한 햇살로 밖에 채울 수 없는 공간에 멜빌은 서 있다. 그곳은 우리가 모두 서본 적 있는 공간이며, 고개를 들어 우러러보는 것이 아닌 고개를 내려 어루만질 수 있는 인간의 자리다. 그곳이야말로 신과 인간이 가장 가까워지는 틈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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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클라베를 봤던 5월의 메모
콘클라베가 시작되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로 선서를 하는 추기경들. 얼굴들, 얼굴들, 얼굴들. 생각나는 송구영신의 밤. 한 해의 시작이란 깜박깜박 졸린 것이었다. 내 이름은 새삼 주님을 찬양한다는 뜻. 찬송은 어디를 향하나. 더 높은 곳? 더 숭고한 곳? 종교는 내리는 걸까, 재배되는 걸까. 예수는 땅에서 났다. 그리고는 올라갔다. 밤의 낯섦과 밤의 졸림은 멀다. 이제 나는 교회에 가지 않는다. 내 삶은 숭고를 잃어가는 걸까. 질문으로 우뚝 서는 법. 자리를 가장 탐내지 않는 자가 자리에 가장 적합한 사람이라는 콘클라베의 역설을 삶에도 적용시킬 수 있나. 꾸벅꾸벅 조는 이는 실은 밤에 가장 어울리는 사람. 밤을 탐내지 않는 사람. 그렇게 되고 싶은 걸까. 아니면 마음껏 밤을 훔치고 싶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