빔 벤더스,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히라야마의 하루
저 과감함은 어디서 올까. 히라야마(야쿠쇼 코지)의 일상을 지켜보며 계속 들었던 생각이다. 그는 한치의 뒤척임도 없이 일어나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양치를 하고, 수염을 정리하고, 면도를 하고, 식물에 물을 주고, 작업복을 갈아입고, 차키와 동전을 챙기고, 자판기에서 캔 커피를 사고, 차에 올라탄다. 이 과정에는 지연되는 시간이 없다. 출근길에 들을 카세트테이프를 고를 때가 첫 선택의 순간이다. 이때까지 영화에 시점숏이 개입할 자리는 없다. 출근길에서 도쿄의 풍경을 히라야마가 바라볼 때라야 영화는 비로소 그의 눈을 우리에게 허락한다.
아침 장면을 돌이켜 보자. 나는 이때 카메라가 왜 고정되어 있지 않은지 궁금했다. 카메라는 화면을 꽉 채울 정도로 가까이에서 히라야마의 동작을 잡아낸다. 나중에야 이것이 구도자로서의 히라야마를 3인칭 시점으로 잡는 것이 아니라, 철저한 루틴 아래에서도 변화하고 생동하는 그의 표정을 붙들려는 시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고정된 일상을 '흔들림'으로 담아내는 것. (4:3 이라는 화면비 역시 그의 얼굴을 담기 위한 연출적 선택으로 여겨졌다.)
다시 출근길. 히라야마가 올드팝을 들으며 차를 모는 동안 스크린에는 그의 얼굴과 시선이 교차한다. 옆에서 본 히라야마의 비스듬한 표정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는 알 수 없고, 히라야마는 일터에 도착한다. 그는 주차를 마치자마자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듣던 음악을 끊고 차에서 내린다. (영화는 히라마야가 출근을 하는 동안 음악을 디제시스적 사운드로 배치하며 그의 출근길을 하나의 노래로 편집했는데, 그 덕에 그 노래가 끝나기도 전에 재생을 멈추는 그의 행동이 더욱 강조된다.) 목적지에 도착하자마자 음악을 거두는 히라야마의 습관은, 일상에 감상이 틈입될 여지를 주지 않겠다는 그만의 내적 동기를 나타내며, 그의 생활이 섣부르게 낭만화되는 것을 경계하는 영화의 태도와도 동기화된다.
히라야마는 화장실을 청소할 때도 주저함이 없다. 불필요한 동작이나 숨 고르기조차 없는 그의 몸짓은, 그를 늘 ‘시작’의 상태로 존재하는 사람처럼 느끼게 한다. 하지만 그의 노동에는 반드시 여백이 끼어든다. 화장실을 이용하려는 사람이 들어오는 순간, 그는 밖으로 나와 기다려야 한다. 히라야마는 대기하며 처음으로 공백의 시간을 보낸다. 벽에 비친 그림자,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금속 천장에 비친 사람들… 그가 바라보는 풍경이 스크린에 투영된다.
점심시간, 샌드위치를 먹던 히라야마가 나무를 올려다 보고, 카메라를 꺼내 하늘 사이로 흔들리는 잎을 찍는다. 그는 뷰파인더를 들여다보지 않는다. 카메라를 손을 아래로 내려 잡고는 눕혀서 사진을 찍는다. 이러한 촬영 방식은 자동기계인 카메라의 시점을 통해 사진에 우연을 기입하려는 모색의 행동처럼 보인다.
히라야마는 현상된 일주일 치 사진을 단호하게 추려내는 과정을 거친다. 1초도 걸리지 않는 시간 동안, 그러니까 거의 본능에 가까운 직감으로 보관할 사진을 고르고, 그렇지 않은 사진은 찢어버린다. 여기에는 분명 '선택'의 과정이 있는데도 히라야마의 동작은 아침 루틴을 지킬 때와 별반 다르지 않다.
코모레비의 얼굴
히라야마는 어쩌면 기계가 되고 싶은 걸까. 그는 말이 없다. 영화가 하고자 했던 것은 (관객이 짐작할 수 없는) 그의 심연이 간신히 번지고 가시화된 얼굴을 기록하는 일일 뿐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영화는 하루가 끝날 때마다 히라야마의 무의식을 영상 언어로 스케치한다. 그의 꿈결은 일종의 코모레비로 남아 또 하나의 표면으로 작동하며 고유한 모호함을 남긴다. 다시 도시는 새벽을 지나고, 영화는 그의 몸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히라야마의 얼굴로부터 하루를 시작한다.
청소 도구, 카세트테이프, 소설책, 월별로 정리한 사진까지. 히라야마의 강박적인 정리는 반드시 실재하는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의 차와 집은 몸처럼, 영혼을 옮겨 담는 그릇처럼 그곳에 있다. 히라야마의 아카이브는 그가 몸과 영혼을 물리적으로 분리하고자 하는 일처럼 다가온다. 타카시(에모토 토키오)와 그의 애인 때문에 하루가 망가졌어도, 아카이브에는 그 기록이 남지 않는다. 히라야마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태롭게 지켜왔을 것이다. 곧 차와 집은 그에게 분리된 신체이자 거칠게 표현하자면 선별된 영혼의 보관소와 같다.
그러니 영화의 사건이 그의 차와 집을 타인이 점유하며 발생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히라야마는 사랑을 울부짖는 타카시가 팔아버리려 했던 카세트테이프를 지키고 그에게 돈을 준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히라야마는 영화에서 처음으로 일렁이는 얼굴을 하고 있다. 슬픔이 비치는 얼굴로 못 말리겠다는 듯 웃는 그의 표정은, 그가 스스로 카세트테이프를 지키고 싶다는 감정을 알아챈 것에서 기인했으리라. 기계가 될 수 없음을 알아버린, 진득하게 밟히는 삶의 미련을 떼어내지 못한 얼굴이 그곳에 있다. 그는 곧 기름값 때문에 카세트테이프를 팔아버려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가 그날 팔아버린 것이 정말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여전히 알 수 없다. 히라야마가 그날 꾼 꿈에는 한 어린 소년이 나오고, 그 꿈은 유동하는 물 그림자처럼 흔들린다.
며칠이 지나 조카인 니코(나카노 아리사)가 히라야마의 집에 찾아온다. 그는 집의 2층을 차지하고, 히라야마의 소설을 가져간다. 일차원적으로 말하자면 니코가 히라야마의 내면에 들어온 것이다. 히라야마는 니코를 찍어줄 때라야 처음 카메라의 뷰파인더를 본다. 히라야마는 니코를 찍은 사진을 찢어버렸을까? 사진을 정리할 때 나는 그가 그런 충동을 느꼈으리라 생각한다. 그의 사진에는 사람이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는 사진을 지울 수 없었을 테다. 그가 니코의 사진 앞에서 머뭇거렸을 몇 초의 시간을 상상한다. 그 주저의 시간 동안 새어 나왔을 영혼의 물기는 히라야마의 집에 작은 곰팡이를 피워냈을 것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구체적 현실과 불가피하게 관계를 맺을 수밖에 없는 카메라, 또는 영화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타카시가 갑작스레 일을 그만두고, 야근까지 하며 2인분의 노동을 했던 하루는 히라야마가 반복되는 일상으로 지탱하고자 했던 삶의 형태가 실은 얼마나 아슬아슬한 기반 위에 있었는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히라야마는 점차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다. 겨우 그림자를 겹치며 더 어두워질 수 없는 하루하루를 보낸다. 동시에 그의 변주되는 하루에는 늘 우연이 새겨진다. 옆집 할머니의 빗질 소리, 도시를 배회하는 노숙자의 몸짓, 달라지는 꿈…
마지막 장면, 영화는 빛을 받으며 출근하는 히라야마의 얼굴을 정면으로 오래도록 비춘다. 그 풍경은 빔 벤더스에게 영화의 영감이 되었던 '코모레비'를 야쿠쇼 코지의 얼굴을 통해 스크린에 현상하는 과정이다. 코모레비의 미적 본질은 실시간성에 있다. 햇빛과 바람과 나뭇잎이 오직 그 순간에만 존재하는 풍경을 만들어내는 것. 영화는 그렇게 매 순간 변화하는 야쿠쇼 코지의 얼굴을 찍는다. 영화는 일종의 결, 혹은 질감으로서 세계와 관객 사이에 놓인다. 야쿠쇼 코지의 얼굴은 바로 그 표면을 입은 채로 영화의 가장 바깥에서, 허구와 현실을 유유히 경유한다. 정말이지 만질 수 있을 것만 같은 물기가 그곳에 있다. 기계의 몸을 탈피하여 우연 그 자체가 된 얼굴.
영화에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시점숏이 하나 있다. 히라야마가 출근을 하기 위해 집밖으로 나올 때마다 바라보는 하늘의 모습이 그것이다. 그가 본 하늘은 어땠을까. 영화는 그 풍경을 관객의 몫으로 남긴다. 그 우연을 긍정할 수 있다면, 오늘은 언제나 불완전함으로 완벽해질 수 있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