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남, <토마토의 정원>
<토마토의 정원>을 처음 본 건 작년 단편영화 상영회 '스토리업 쇼츠' 기획을 위해 영화를 살펴보면서였다. 스토리업 쇼츠는 CJ문화재단 주최 상영회인데, 상영작에는 재단의 단편영화 제작지원 사업인 '스토리업'을 통해 만들어진 영화들이 필수로 포함되어야 했다. 하지만 19년 제작지원작인 <토마토의 정원>은 24년 중순까지 쇼츠 상영작에 포함되지 못한, 쇼츠 기획에서 이미 어느 정도 멀어진 작품이었다.
최근 화제작을 중심으로 상영작을 구성하는 쇼츠 특성상 19년 제작지원작은 23년부터 쇼츠 일을 시작한 나에게는 관람 우선순위에서 멀어져 있었다. 하지만 업무 중 잠시 짬을 내서 재생한 <토마토의 정원>을 보자마자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이 영화를 다음 상영회에서 틀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물론 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영화는 투박했고, 다소 습작 같았다. 하지만 14분 남짓한 영화가 끝나자마자 너무 뭉클해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1층 밖으로 내려갔다. 방학이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7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름의 빛이 따뜻해서 생경하게 느껴졌다.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작년 처음 영화를 보았을 때 기억이 났다. 왜 종종 이 영화가 생각날까. 3년 전 세상을 떠난 아빠를 떠올리다 영화를 다시 보았다. 내게 <토마토의 정원>은 작년 1층 계단을 내려가며 만졌던 빛의 질감으로 남아있다. 운동장과 분리수거장 옆 정원, 여름과 방학, 죽음과 짝사랑, 물줄기와 그림자가 섞여 있는 풍경. 그리고 그 위를 덮고 있는 노란 햇살.
이리와 철희, 지민과 선희는 '소원의 풀'이 있는 학교의 작은 정원에서 계속 이리저리 마주친다. 그 앞에서는 강당 5층 확장 공사가 한창이다. 무언가를 은폐하려는 듯한 저 공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 아이들은 현장을 바라보며 불만을 터뜨린다. 하지만 영화는 결코 그곳으로 카메라를 돌리지 않는다. 영화 초반 공사 중인 건물이 나온 인서트가 있었으므로, 이는 분명 영화의 선택이었다. 그 덕에 정원은 저 현장 아래로 종속되는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충만한 아이들의 장소가 된다.
아이들은 소원의 풀 앞에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시시콜콜한 욕과 잡담이 대부분인 말 안에서도 아픈 진심은 발아한다. 소원의 풀이 잡초가 아닌 토마토였다는 것, 또 신비로운 힘이 있어서가 아닌 2반 소원이가 심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비밀은 한 겹씩 벗겨지며 아이들 사이에서 차례로 전해진다. 아이들은 여전히 소원을 빈다. 소원에는 가장 안쪽의 마음이 담기기 마련이므로, 이리가 지민을, 선희가 철희를 좋아하는 걸 모두 아는 것은 소원의 풀뿐이다.
공사 현장을 보며 지민이는 5층에서 떨어지면 아프지 않고, 깔끔하게 죽을까 무심히 묻는다. 아마도 소원이는 많이 아팠을 것이다. 무른 흙 아래로 풀을 심었을 소원이는 그것이 토마토였다는 걸 알았을까. 윤소원 진짜 떠났나봐, 빨간 열매를 피우지 못한 식물을 보며 선희는 말하지만, 토마토가 안 열려도 토마토는 토마토다. 소원이가 살지 못한 시간을 아이들은 살아갈 것이다. 정원 위로 피어난 노란 토마토는 그러므로 미리 맺힌 미래이자, 그 자리를 살아가는 현재다.
짝사랑과 농담으로 무장한 아이들은 쉽게 무력해지지 않는다.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잘 자라니까. 친구 대신 먹어주던 토마토가 어떤 싹을 틔울지 모르는 채로, 방학은 찾아온다. 방학이 끝나면 소원이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4층 옥상의 풍경은 다시 볼 수 없겠지. 하지만 아이들은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여전히 허구한 날 축구공을 차고 학원 숙제를 지겨워하겠지만. 너희들의 구석 어딘가에 아주 작은 정원이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게 된다면 소원이도 사라지지 않는 셈이 될 테다.
<토마토의 정원>를 상영했던 섹션의 이름은 'After Yesterday'였다. '어제'라는 과거를 호명하면서도, 어제 이후인 '지금'을 그리는 노스텔지어를 나타내고자 했던 섹션명이다. <토마토의 정원>은 그리움을 모르는 그리움의 영화다.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햇살이 그런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