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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r 06. 2022

굿 리스너

'듣기'에서 '들어가기'로

이번 올림픽 피겨 경기를 보면서 2년 전 이맘때 기억이 났다. 목동에서 열린 '4대륙 피겨선수권 대회' 진행요원으로 4일간 단기 알바를 했던 때. 맡은 일은 주차장에서 선수들을 실은 대형 버스가 오면 안내를 하는 쉬운 업무였다. 날씨가 엄청 추웠던 탓에 30분씩 교대 근무를 했다. 그 덕에 쉬는 시간 30분마다 관중석에 들어가 피겨를 봤다. 눈앞에서 본 피겨 경기는 정말이지 아름다웠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에 관해 쓰려는 건 아니다. 경기장에서 흥분했던 30분이 아니라 바깥에서 근무를 서던 30분. 그때 나눴던 대화로부터 시작하고 싶은 글이다.


같이 근무를 서는 사람이 있었는데 나 같은 단기 알바생이 아니라 경호 회사 직원이었다. 근무 시간/쉬는 시간의 루틴이 달라서 매번 같은 사람과 근무를 선 건 아니었지만 가장 오래 시간을 보낸 직원이 있었다.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 탓에 누군가와 함께 있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웠는데, 그분이 먼저 말을 걸어주어 다소 덜 어색하게 시간을 보냈다.


기타를 친다고 했다.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입시 실기 준비를 위해 몇 달 동안 경호 일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왜 자기가 음악을 하게 되었는지, 어떤 음악을 하고 싶은지 같은 이야기부터, 지금 사는 곳은 어디고 왜 이사를 오게 되었는지 같은 거시적인 가족사까지 내게 자연스레 이야기했다. 그가 문자로 추천해 준 재즈 앨범을 듣고 다음 날 감상을 말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내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알게 된 정도에 비해 그는 나를 거의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마지막 날이 되자 내심 이 인연이 계속되길 바라는 눈치였다. 대화 중간에 '언제든 문자 하시면 또 추천해 드릴게요'라든가 '언제 어디서 마주칠지는 모르는 거니까 그때 또 보면'처럼 미래를 기약하는 말을 흘렸다. 나 역시 그걸 모르지 않았지만 애써 반응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주찬님이면 뭐 이렇게 만난 사람한테 또 연락하실 거 같진 않지만'이라며 내 마음을 정확히 짐작하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들을 땐 찔리면서도 내심 안심했다.


마지막 날 퇴근을 30분 앞두고, 갑자기 그는 자신의 더 내밀한 가족사를 속성으로 털어놓기 시작했다. 같이 일하는 사람들 누구한테도 하지 않은 이야기라며. 이걸 꼭 말해야겠다는 필사적인 감정이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 얘기가 아주 조금은 고백처럼도 들렸다. 물론 왜 이걸 고작 4일 본 나한테 말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단지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나는 그냥 들어주는 사람이었을 뿐이야. 자기를 감추는 사람에게 네 속사정을 꺼내놓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그의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올림픽 덕분에 오랜만에 그가 생각났다. 그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내놓던 감정을 제단 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저 '듣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었다. 들어주는 사람이 꼭 사려 깊은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저 침묵을 지키며 가만히 귀를 열어놓은 (혹은 그런 척하는) 사람일 수도. 형이 언젠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오른다. "너는 사람 말을 잘 들어주는 것 같아." 그 말이 끔찍하게 아프고 민망해서 형의 눈을 쳐다볼 수 없었다. 나는 형에게 내 이야기를 한 적이 없다. 그러면서 이런 나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 말하는 형을 함부로 연민했다.


나는 언제나 굿 리스너를 필요로 하는 투머치토커였다. 내 커다랗고 빈약한 자아를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한 두 명의 친구나 애인에게 정말 많은 것을 쏟아냈다. 어떻게든 나를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넘쳐서 바닥이 자꾸 젖어버리는 대화였다. 그런 밤은 뿌듯하고 부끄러웠다. (그 욕망이 이렇게 온라인 공간에 나를 써내는 것으로도 이어졌으리라.) 하지만 반대로 나는 굿 리스너였을까? 그런 질문 앞에서는 여전히 작아진다.


'이야기를 잘 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던 몇 번의 기억들이 선명하다. 그 말은 내게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내가 잘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으니까. 내가 그들에게 잘 들어주는 사람이었다는 걸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럴 때면 나 자신이 낯설었다. '잘' 듣는다는 건 뭘까. 이런 의문에 도착해, 나를 돌아보며 감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잘 듣는다는 건 용기를 내는 일이 아닐까 하고. 귀가 필요한 사람 앞에서 단지 귀가 되어주는 것에서 나아가, 몸을 기울여 그의 세계로 들어가려는 일. 그리하여 이해할 수 없는 당신을 귀를 기울여 조금이나마 담아내는 일. 그런 찰나의 경험은 말 그대로 기적 같다. 내가 아닌 너로 가슴이 미어지고, 무력해지는 것.


그리하여 듣는다는 것은 그 앞에서 필요한 만큼의 나를 내어 쥐여주고픈 마음으로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나는 아마 나를 내보일 수 있는 사람에게 리스너가 되겠지만, 이제는 그것이 우선하지는 않는 사람이고 싶다. 나를 드러낼 수 있는 대상을 찾기에 앞서, 내가 듣고 싶고, 내게 자기를 털어내주길 바라는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 그 앞에서 치열하고 겸허하게 집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 언젠가는 그럴 수 있을까.


나는 내가 그분이 바라는 친구가 되지 못할 걸 알았다. 그래서 그에게 무심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도 나는 누군가에게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해서는 마음을 쓰지 말아야지. 대신 함부로 판단하지도 않아야 하지. 그러나 용기를 내어 내가 당신에게 굿 리스너가 되는 날이 오길 바란다. 내게 주어진 귀의 총량을 그렇게 아낌없이 쓰고 싶다. 또한 그것이 내가 세계를 대하는 필연적인 태도가 되었으면 한다(내게는 아직 어려운 과제겠지만). 내가 가진 진심을 더 날카롭게 벼르고 소진할 수 있는 방법을, 직접 처하고 닥쳐가며 반드시 발명해 가고 싶다.


*타인이 등장하기에 실제 경험에서 디테일을 조금 변형시켰습니다.

**사진 출처: 원앤제이 갤러리 전시 <정소영: 해삼, 망간 그리고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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