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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C May 25. 2022

다락과 옥상, 창문과 세상

성장에 관하여

성장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참을 머뭇댔다. 그건 나를 오랫동안 지탱해온 단어였다. 언젠가 나도 모르게 성장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이 아니었다면 나는 그 불안한 밤들을 어떻게 넘길 수 있었을까. 그런데 대학교 마지막 학년을 다니며 본격적인 취업 준비를 앞둔 지금, 나는 왠지 그 단어에게서 도망을 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래서인지 '무엇이 나를 성장시켰을까'라고 묻는 건 조금 버겁다. 그보다는 차라리 '나는 정말 성장했을까'라고 질문해 보고 싶다. 그러면 풍경 하나가 펼쳐진다. 나만 알고 있는 별것 아닌 이야기.


중학교 때 처음으로 내 방이라는 게 생겼다. 그 자체로 나는 자기 방을 가지지 못했을 많은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 특권을 가진 것이었겠다. 그때 우리 집에는 몇 가지 큰 위기가 닥쳤는데, 방이 있었던 덕에 나는 거실과 안방에서 밀려오던 파도로부터 간신히 도망칠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자연스레 스스로를 보살피게 되는 방식이란 정말 신기할 때가 있어서, 그렇게 도피한 방에서 나는 누구도 모르게 나만의 공간을 만들어냈다. 나는 거길 다락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기에는 너무나 빈약하긴 했지만.


내 작은 다락. 그곳에서는 내 새벽의 원풍경이 흘렀다.


1층 구석이었던 내 방에는 곰팡이가 잘 피어났었다.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존 창문 앞에 새로운 창문을 하나 더 만드는 공사를 진행해야 했다. 작업이 끝나자 창문과 창문 사이에 (별로 튼튼하지는 않아 보이는) 나무로 메운 작은 공간이 생겼다. 그곳에는 주로 안 입는 옷이나 잡동사니를 박스에 담아 올려두곤 했다.


언제 처음 그 사이로 몸을 집어넣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열여섯, 방 바깥에서는 혼란스러운 가정사가 일렁이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새벽으로 나를 두르기 위해 창문과 창문 사이로 숨어들었던 걸까. 그렇다면 그건 나를 지켜내기 위한 본능적인 동작이었을까. 쉽게 대답하기는 어렵다. 단지 방문과 창문으로 덧댄 공간 안에서 나는 안전했다는 것. 거기서 다리를 가슴으로 한껏 구부리고 패닉과 윤하, 에피톤 프로젝트와 에픽하이를 들었다.


그렇게 가만히 앉아 건너편 아파트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다. 한 시간 두 시간 음악을 듣고 있다 보면 하나하나 꺼져가는 불빛들. 허리와 목이 뻐근했지만, 그 정경은 내게 뭐라 말하기 어려운 안도감을 주었다. 잠자리에 든다는 건 말 그대로 몸을 누일 수 있는 '자리'가 있다는 뜻. 몸을 웅크리던 창문 사이의 공간은 내게는 조금 좁았다. 언젠가 나도 나와 꼭 맞는 자리를 갖게 될까. 걱정 없이 잠에 들 수 있을까. 아득히 그런 생각을 했다.


공교롭게도 나는 그 시기부터 남몰래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한두 명의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했던 나만의 작은 비밀. 가사나 시를 만들어 끄적여 놓은 이면지와 메모 파일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렇다고 내가 쓰기에 재능을 가진 것은 전혀 아니었다. 페소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지 내가 '홀로 있는 방식'이었던 것 같다. 혹은 새벽이 밥처럼 꼬박꼬박 짓는 표정이었거나. 십 대 후반과 이십 대 초중반을 거치며 그런 새벽에 이름표를 붙이기 위해 이런저런 문장을 써낼 때면, 나는 내가 여전히 창문 사이에 비집고 앉아 밖을 응시하는 열여섯의 소년으로 느껴지곤 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는 기분과 한 치도 자라지 않았다는 예감 사이를 오가는 밤들이었다.


이십 대가 되어 나는 본가를 떠나 여러 방들을 거쳤다. 대학교 기숙사와 세 개의 자취방. 더 이상 몸을 구겨 넣을 공간은 없었지만, 나는 대신 옥상을 찾아냈다. 매캐한 냄새가 풍기는 공단 사이에서도, 일상의 소리들이 그대로 난무하던 빌라촌 사이에서도 옥상에 올랐다. 그곳에서도 나는 깜박이는 생의 불빛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자기와 꼭 들어맞는 자리 같은 건 누구도 가질 수 없다는 걸.


하지만 점멸하는 내 방 역시 저 배경을 이루는 하나의 빛이라는 것도 이제는 안다. 그래서 떠올려 볼 수 있다. 각자의 다락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어둠을 지새우고 있었을 당신들을. 거기서 당신이 바라보던 원풍경은 무엇이었는지 살짝 엿듣고도 싶다. 우리가 몰래 지나오던 유예의 시간 안에서 당신의 손톱은 어떻게 자라고 있었는지. 뚫어지게 지켜보아도 자라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던 손톱이 어느 순간 길어져 있는 딱 그 속도로 우리는 성장해 왔을 테니까. 그렇게 항상 같은 모습을 가지고도, 지금 이 순간에도 슬그머니 자라나고 있다는 것이 성장이 가진 아름다운 모순이라고 느낀다.


내년이면 아마도 나는 새로운 자리에서 새로운 역할을 걸친 채 살아가고 있을 테다. 여기가 내 자리가 맞는지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어떻게든 세상의 빈틈에 나를 들이밀면서. 정해진 삶의 행로에서 잠시 내려 새벽의 정류장에 정박하는 시간도 여전히 반복될까. 어쩌면 나는 바삐 작동하는 세계에 몸을 밀어 넣으며 아침마다 눈동자의 색을 바꾸게 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열여섯의 나와 스물일곱의 내가 똑같은 풍경을 함께 바라보며 쓴다. 달이 차올라 새로 마침표를 찍어내듯, 무엇이든 나의 문장을 계속 적어 내리고 싶다고. 당신도 그러길 바란다. 변하는 채로도 변치 않기를 바란다. 그래서 내어 놓는다. 다락과 옥상, 창문과 세상, 정말 별것 아닌 이야기. (20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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