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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찬 Jul 27. 2022

항아리

왜 항아리라고 글 제목을 붙였을까. 작품에 붙어있던 용기라는 이름도 있는데. '항'이라는 단어 때문인 것 같다. 전시장 안에는 항아리, 혹은 용기들이 놓여있었다. 항아리, 라고 그 사물들을 부르자 항아리 하나하나가 알알이 이 세계를 이루는 여러 항목이 되었다. 그것은 비체계적인 세계를 나누는 부표로 작동하는 것만 같았다. 세계를 서술하는 무정형의 체계 사이를 거닐며 마치 '일의 항목이나 내용'을 짜듯 항아리를 빚었을 손을 상상했다.


또한 수학 시간에 배웠던 '항'이 생각났다. x, 3, 3x + 2y, x^2y+4y 이런 것들은 항이지만, 등호가 들어가는 2x+7y^2=3 이런 건 항이 아니라 식이 된다는 이야기. 전시장에 놓인 항아리들이 식이 되지 못한 항의 마을 같았다. 어디선가 등호가 길을 잃고 헤매고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등호는 평생 전시장을 찾지 못할 것이다. 식이 되지 못해 연결되지 못한 항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맺는 느슨한 관계가 좋았다. 반드시 식이 되어 체계를 갖추려는 것이 사회라면, 어딘가에는 이렇게 숨어 항끼리 모여있는 마을도 있는 것이다. 항의 마을은 식이 되려는 욕망과 완전히 사라지려는 욕망이 부딪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긴장상태로 항아리들은 둥글게 존재할 것이다. 파편이 되는 꿈을 꾸면서.


길 건너편에는 얼마 전까지 인디그라운드였던 언덕 위 건물이 보였다. 지금 이곳에 올라와 예전이 되어버린 어떤 풍경을 상상하니 이상했다. 하얀 건물은 갈색 건물을 쳐다 보고 있었을 텐데.


항아리들은 거꾸로 뒤집어 놓은 물음표 같기도 했다. 물음표 아래 점이 둥근 고리 위로 쏟아져 그대로 말려들어간 모양. 무언가를 묻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해 웅크리기로 한 것처럼. 그렇게 스스로를 묻어버린 것처럼. 그 모양은 담아내는 것이기도, 고여내는 것이기도 다. 자기 자신을 묻은 공간에서 벽을 쓸어내리는 손이 보였다. 둥글게 둥글게. 항아리 바깥의 비늘들은 그렇게 생겨났을까. 물음표가 되어 망망대해를 떠다니는 물고기 한 마리는, 입에 머금고 있는 질문이 있어 어떠한 미끼도 덥석 무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와 떠올리면 그것은 고요함도 아니었다. 내게 고요함은 닫힌, 단단한 물체인데, 항아리들은 위가 열려있었고 둥그스름한 표면을 가지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 같은 형상을 하고는, 고고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늘이 묻은 안쪽 벽은 흘러내림을 박제한 듯했다. 작가는 어떠한 모양이 될지 모르는 채로 작업을 시작했다고 했다. 항아리의 모양이 자연스럽게 잡혀갔을 바로 그 과정처럼 알게 되었다. 모든 건 흘러내리고 있는 거라고. 그러니 무엇이 된다는 건 애초에 가능하지 않았던 거라고. 이 건물도, 내 몸도 흘러내림을 증언하기 위해 우뚝 서 있다. 항아리는 무너짐을 본뜬 모양으로 세워졌다. 마치 물음표가 그렇게 만들어졌듯이.


더운 날씨였다. 물음표가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리고 있었다. 우주가 질문을 내리는 법이 아닐까 하고, 아주 크고 넓게 퍼진 하나의 점을 상상하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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