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주찬 Sep 03. 2022

행간

어제가 꿈같다. 새벽은 밤과 아침 사이의 행간. 행과 행의 사이. 행과 불행의 사이. 진공 상태이자 마비 상태로 존재하는 그곳에서 몸을 웅크리면 시간이 쉽게 기화된다. 애초에 없었던 시간인 것처럼. 그러고 나면 두려운 아침이 온다. 그만큼 두려웠던 새벽이 지났는데도.


어제는 공간잡지를 표방하는 전시에 갔다. 예전에 목욕탕이었던 곳을 개조해 만든 신생공간에서 열린 전시였다. 언제 무용해질지 모르는 불완전한 공간이었다. 공간 자체가 효용과 효용 사이의 행간 같았다. 고립되고 숨어있던 공간. 텍스트가 전시된 테이블 하나하나는 일종의 행이었다. 그러니 90분의 시간 동안 나는 행간에서 몸을 웅크리고 텍스트를 본 셈이었다. 하지만 지상과 지하 사이 손바닥만 한 창으로 작게 들어오던 빛을 봤을 때, 나는 행간의 숨은 가능성을 엿보았던 것만 같다. 말하지 않는 것으로 더 많은 말을 전하는 것. 그러니 이 감상기 역시 아주 보잘것없는 이름 붙이기에 불과한 것이다.


"여백은 가청범위를 초과하는 소리다"


그 문장 아래 있던 끝없는 여백을 떠올린다. 그렇다면 글자란 (가청범위 안의) 소리인 걸까. 소리가 아닌 것마저도 소리가 아닌 소리가 되는 거라면, 발화되지 못한 무음의 말이, 표정이, 입술이, 눈물이 가진 형태란 무엇일까.


요즘은 형태에 관한 생각을 많이 한다. 의자는 의자의 형태를 가졌다. 그러니 의자에 앉는 일은 그저 정직한 행위다. 전시장의 테이블 위에 텍스트가 얹힌 형태, 관람객에게 제공되는 트레이 안에 A4 크기의 종이가 알맞게 들어가는 형태는 그래서 아주 안심이 된다. 형태는 행위를 가정한다. 팔을 벌리는 형태는, 누군가를 안고 싶다는, 혹은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다는 마음을 형상화한 것이다. 손과 손을 맞잡은 간절한 형태를 상상하면 아찔해진다. 각각의 손은 결코 맞잡은 손을 온전히 감쌀 수 없다. 손의 맞잡음은 필연적으로 손의 여백을 만든다. 여백이란 역설적이게도, 어떤 채움의 빈 자리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가청범위를 초과하는 소리다. 하여 손을 잡거나 껴안았을 때, 닿는 면적 이외 상대의 모든 몸은 내가 가닿을 수 없는 영역이 된다. 당신을 알 수 없다는 표현은 그래서 촉각이고,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촉각을 동반하는 은유이다. 은유는 형태/형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행간이란 여백의 일종이므로, 행간 역시 은유가 된다. 행간은 종종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이 모인 여백이다. 생의 넓이를 가질 수도 있는.


선형의 흐름을 따르지 않고 발췌독을 적극 허용하는 잡지의 성격이 공간에 그대로 녹아있었다. 그렇다면 이 공간은 하나의 책인 것일까. 관람객에 의해 텍스트가 서로 엮이고 엮일 때 이 책은 자연스레 엮음을 수행 중인 걸까. 그렇다면 이 책이 정지해 있는 순간에도, 공간은 여전히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책은 정지할 수 없는 형태의 물질이 된다. 꼭 끊임없이 유동하는 우리의 몸이 그러하듯 책이 마음을 가진 것만 같다.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고민을 하는, 때로는 마음을 여는 친구로서의 책. "책은 친구를 만들어준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책이 "우리에게 배를 보이고" 친구가 되어줄 수는 있을 것 같다. 친구를 살짝 그 단어 정의 바깥에서 만나기만 하면 될 일이다. 그러므로 책을 읽어도 외로운 건, 책의 탓이 아니다. 외로움은 언제나 외로움의 탓이다. 행과 행 사이에서 자꾸 웅크린다. 외로움의 서툰 형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밤식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