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쑥 찾아왔던 가을이 슬쩍 뒷걸음질을 치는 날씨였다. 여름이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다. 아빠가 돌아가시고 처음 맞는 명절. 아침에 엄마, 형이랑 납골당을 다녀왔다.
지금은 5월의 끝과 6월의 시작에 걸쳐있던 장례식 때와 비슷한 밤의 온도다. 장례식 둘째 날 새벽, 늦게까지 있어 준 친구들이 모두 떠난 뒤 집으로 와 샤워를 했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식장에 갔을 때는 가족과 친척 모두가 방에서 잠들어 있었다. 비로소 텅 빈 식장 안에서 아빠의 죽음을 실감했다. 장례식 기간 중 유일하게 조금 울었던 순간이다(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나는 장례식에 거의 집중할 수 없었다).
몇 년 전, 저혈당 쇼크로 아빠가 침대에 널브러져 있던 날. 엄마랑 나는 평소보다 훨씬 고통스럽게 몸을 뒤트는 아빠를 보며 죽음을 감지했다. 그런데 그때 생과 사의 경계에 있던 아빠가 엄마와 내게 갑자기 말을 토했다. 미경아, 주찬아, 미안해, 자꾸만 소리치던 당신. 아주 선명하게. 아빠는 저혈당이 오면 언제나 그랬듯 있었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그때 이미 아빠의 유언을 전해 받았다고 느꼈다. 죽음을 의식한 몸이 본능적으로 끄집어낸 심연의 언어. 그게 겨우 미안해, 라는 마음의 진득한 잔해였다니. 참 여리고 불쌍한 사람이지. 그리고 그 말에서 배제되어 있던 형을 떠올리게 된다. 아빠는 왜 형의 이름은 말하지 않았어?
오랫동안 준비한 죽음이었다. 엄마도 종종 말하곤 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아빠가 갑자기 죽은 줄 알고 내가 엄청 힘들어할 거라고 생각하는데, 아빠 죽을 고비 수십 번도 넘겨가면서 우리는 이미 옛날부터 준비를 했잖아." 그런데 지금은 그 '준비'가 무엇이었을까 생각한다. 그건 그냥 아빠 없이 살아가는 일을 연습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말 그대로 죽음을 준비한 것일까. 어떻게?
둘째 날 새벽, 훌쩍이며 쳐다본 영정사진 속 아빠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빠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해보려 노력할 기회가 아마도 영영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아빠가 더 오래 살았더라도 나는 그 노력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마주 봐야 하는 일이 어려웠다.
마음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저려왔다. 장례식이 끝나고 며칠 뒤, 같이 야식을 먹으며 형이 서툴게 물었다. 너는 아빠 하면 가장 좋은 기억이 뭐야? 형의 어색한 질문 앞에서 나는 당황했다. 생각 나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기억을 추억으로 만드는 재료는 투박하지만 진심이다. 아빠와 지내던 시간에 묻은 내 마음의 이름은 연민, 의무, 부담, 책임 등이었다. 거기에 진심도 있었을까? 나는 내게 먼저 마음을 보이지 않은 아빠가 뒤늦게 야속했고, 그럼에도 아빠에게 마음을 잘 내어놓지 않은 내가 미웠다. 대답을 하지 못한 나를 두고 형은 아빠에 관한 사소한 기억 몇 가지를 꺼내놓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방으로 가 잡동사니가 든 작은 박스를 하나 꺼냈다.
거기에는 아빠가 형에게 쓴 편지가 있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교회에서 하는 아버지 학교에 갔을 때 쓴 것이었다. (기억상 나한테도 썼던 거 같은데 내 편지는 어디 갔는지 모르겠다.) 형에게 편지를 받아 무심코 읽었다. 그런데 몇 줄 읽어보기도 전에 눈물이 줄줄 났다. 거기 있는 아빠의 필체. 손으로 쓴 글씨는 때때로 뼈 같다. 그건 몸의 흔적이고, 그래서 어쩔 수 없는 마음의 흔적이다. 나는 내가 엄마도 아니고 형 앞에서 그렇게 아이같이 울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게 형을 향한 편지였기에 더 마음이 아렸던 것 같다. 형은 내가 누구보다 진심을 드러내기 어려운 사람이니까. 해명할 수 없는 눈물이 편지에 떨어지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아빠는 불투명한 흰색의 잔해가 되었는데, 아슬한 종이 위에 당신의 뼈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 편지는 아빠가 존재했다는, 그것도 마음을 가지고 존재했다는 단순한 증거였다. 아빠는 투석을 시작한 지 몇 년이 지나고 나서부터, 아이가 몇 달 사이에 몰라보게 자라나듯 몰라보게 늙어갔다. 생의 끝자락에 와서 성장을 잘못 되감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리고 기력이 사라져 가는 아빠에게서 영혼의 존재를 느낄 때마다 나는 남몰래 당혹했다. 슬픔을, 서운함을, 덧없음을, 외로움을, 욕망을, 통증을 느끼는 마음. 내가 알 수 있는 마음은 오로지 나의 것이기에, 나는 타인에게 있을 마음을 나의 것으로 가늠해볼 수밖에 없다. 내게 마음이란 무수한 감정이 별처럼 박힌 밤하늘이라기보다는, 그 별들이 마음의 지반 위로 쏟아져 만드는 상흔의 마을에 가까울 때가 많았다. 간신히 별들이 쏟아지는 모양의 아름다움을 복기하며 새벽을 건너지만, 아빠에게도 그렇게 마음을 견뎌내는 방법이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니 나는 당신의 마음을 못 본 체해야 했다. 나는 아빠의 죽음을 준비했다기보다는, 역시 아빠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를 싫어하고 원망해 오던 관성으로 손쉽게 그렇게 했다. 편지를 읽으며 그런 내 얼굴 앞으로 마음을 가진 아빠가 육박해왔다. 투명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아빠를 다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더라구. 몇 달 전, 아빠가 이제 정말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며 친구에게 말했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학기가 끝나면 아빠를 퇴원시켜 마지막 반년 만이라도 집에서 아빠를 돌보겠다 했었다. 그게 죽음을 앞둔 그에게 내가 해주고 싶은 마지막 일이었다. 뭐라고 이름 붙이기 어려운 감정이었다. 하지만 아빠의 똥을 치우는 일을, 나는 결국 하지 못했다. 다행인 일일까. 그걸 하지 못했기에 아빠를 최소한의 존중 속에서 보낼 수 있었던 걸까.
아빠는 두 달 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마지막에는 요양 병원에서 이주를 있다가 돌아가셨다. 형과 면회를 갔을 때 만졌던 아빠의 늙은 얼굴. 엄마는 당신이 아빠랑 있으면 며느리랑 시아버지로 사람들이 착각한다 농담을 하곤 했다. 아빠에게 마지막 십여 년은 삼십 년 어치의 세월을 빠르게 살다 간 거였을지도 모른다. 어느새 지긋한 노인처럼 짙어진 주름을 보며 아빠가 살아온 오랜 시간을 아빠의 언어로 조금은 들어보고 싶었다. 물론 아빠는 말을 잘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후회 같은 건 할 수가 없다. 나는 아빠의 이야기가 그리 궁금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단지 내게는 당신의 미안하다는 말이 남아있다. 그 말 때문에 나는 미련하고 약한 당신을 미워할 수 없고, 이따금씩 당신의 마음을 그려보며 새벽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 불가능한 과제 앞에서 내가 어디까지 무력해질 수 있을까. 그것만이라도 외면하지 않고 싶다. (09.12-13)